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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RTH KOREA NEWS  
로동당, 국군포로 없다고 ? 너희 놈들.... 천벌 받는다 ! 7/14/2008
아오지 탄광 폭파해버린 국군 포로들의 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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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군 포로 김 진수씨의 50년 북한 억류기
이 울프 독 블로그의 3월 8일 포스팅했던 글을 보신 독자 분들

많으시리라고 본다.

북한에 억류된 북군 포로 김병덕씨와 그의
전우 백두산 최 석도 포수-- 그리고 국방부 북한 정책과 조 소영
사무관 도움으로 찾아낸 그의 아들의 불효스러운 반응---  


이 경험은 나로 하여금 북한에 억류된 북한 포로의 생활을
매우 궁금하게 만들었다.


그러던 2 주일 전 나는 정말 기이한 행운을 만났다.

직장 선배를 만나러 수원에 갔다가 오는 전철 안에서
한 노인 어른을 뵙게 되었다.


그가 쓴 모자에  “다부동 대첩”이라는 글이 선명하게 써 있어서

내가 먼저 말을 건 것이 계기가 되었다.




다부동 전투는 1950년 대구 방어 요지인 경북 다부동에서

백선엽 장군이 지휘하는 국군 1사단이 북한군 3개 사단을 상대로

어려운 격전을 되풀이 하며 대구를 지켜낸 전투다.




백 선엽 장군은 나중에 육군 참모총장까지 진급했다.

나는 그래서 그 분에게 물었다.

“ 백 선엽 장군 사단에서 싸우셨나보죠?”

그 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를 알아 주는 것이 기분이 나쁘지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 깜짝 놀랄 일이 생겼다.

바로 할아버지 옆에서 같이 동행하던 중년의 아주머니가 말을

거들고 ,나섰다.

“우리 이모부는요, 빨갱이 놈들에게 붙들러 가서 50년간 죽을 고생을

  하고요, 몇 년 전에야 남한으로 탈출해왔어요.“




나는 정말 놀랐다.

“ 아니 국군 포로였습니까?”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 예-- 재수가 없어서 고생 좀 했지요---”

샛별 광산에서 광부로서 중노동을 했다는 것이었다.

경기도 화성시 에 살고 있는 그 분은 1951년 봄에

불과 스무 살의 나이로 포로가 되어 북한에 끌려갔다가 무려 50년의

세월이 지나서 고향에 돌아온 전 육군 이등중사 김 진수 씨였다.




나에게는 거의 전부 탄광으로 보내졌던 북한 포로들의
비참한 생활에 대해서 들을 절호의 기회였다.

나는 명함을 건네주고 급히 그의 연락처를 받아 적었다.


내가 그와 초면인데도 그는 선선히 그의 연락처를 알려주는 것을

보니 사람 의심 할 줄 모르는 선량한 사람으로 보였다.

그리고 꼭 다시 한 번 만나 뵙기를 간청 드렸다.


그간 궁금하기 짝이 없었던 북한 억류 포로들의 생활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나는 서울로 돌아오고 며칠 뒤 국방부 북한 정책과의
조 소영 사무관에게 전화를 해서 이 분에 대해서 아는지 문의해보았다.

조소영 사무관은 그와 안면은 없었지만 그를 잘 알고 있었다.
"너무 착하신 분이세요-- "
그리고 그의 근황에 대해서는 잘 이야기 하려 하지 않았다.


며칠 뒤 나는 김 진수 씨에게 전화를 해서 만나 뵙게 되었다.




점심을 접대하려 했으나 그 분은 사절했다.

“내가 노인정에서 일을 보는데 노인정에서 밥 먹읍시다.”

덕분에 수원시 아래 화성 시까지 내려간 나는 평생 처음 노인정에서

점심을 대접받았다.


그리고 커피 샾에서 이야기를 나눌까 했는데 김 진수 씨는

그 것도 거절했다.

“ 그런데 돈을 왜 써요? 여기 어린이 공원이 있으니 거기서

   이야기 합시다.”

고생하신 분이라서 절약 정신이 철저했다.




그는 벤치에 앉아서 운명의 장난으로 굴러 떨어졌던 지옥의 생활

50년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담담하게 들려주기 시작했다.




1950년 학교를 졸업하고 장남으로서 집안 일을 돌보고 있던
그는 날벼락 같은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피난을 가야 했다.

그의 집은 경기도 화성에서 상당한 재력을 가지고 있는 가문이었다.

그때 농촌의 집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오토바이까지 있었다.




그러나 전쟁은 그를 피난길에 이어 전선으로 내몰았다.

1950년 피난지 부산에서 군에 입대한 그는 하사관 학교를
단기로 졸업하고 치열한 전투를 되풀이 하며 방어를 하던
국군 1사단에 배치되었다.




사실 그에게 국군 연대장을 하던 매부가 있었다.

그 무렵 그 정도의 빽이 있는 사람은 일선에서
근무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운이 맞지 않아 최 일선 부대 분대장으로

군 생활을 시작하여 6개월 동안을 총탄이 오가는 격전을 치루는

생활을 했다.




그에게 그의 인생을 지옥의 저 밑바닥으로 던져버리는
운명의 전투를 치룬 날은 1951년 어느 봄날에 왔다.

중공군의 춘계 공세를 받아 후퇴를 하던 그의 중대는
중공군에 포위되어 막심한 피해를 당하고 살아 남은 중대원
50여명은 포로가 되었다.




김 진수 씨는 중공군에게 끌려 가다가 기회를 보아 탈출해버렸다.

그러나 하루도 안 되어 붙들려서 사정없이 두들겨 맞고 다시 포로의

신세가 되었다.

포로가 된 사람들 중에 중대장과 두어 명의 소대장 그리고
중대 인사계등의 간부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포로가 된 중대원들은 전부 약속을 하고 가짜 계급을 댔다.

김 진수 씨는 자신의 계급을 이등병으로 진술했고 이 비밀은
북한을 떠날 때까지 간직 할 수 있었다.




포로들은 북한 후방으로 끌려가서 며칠간 정치 장교로부터 같 잖은

정치 교육을 받고 강제로 북한군에 편입되었다.




그 때 중대장은 포로가 된 전 중대원에게 은밀하게 말했었다.

“그저 이놈들이 시키는 대로 하는 척하자.

그러다가 때가 되면 남으로 탈주하자.”

그렇게 결심한 국군 포로병들은 별다른 내색을 안 하고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라서 북한군을 안심 시켰다.




국군 포로병들은 중부전선으로 보내져 후방에서 탄약이니
식량이니 하는 보급품을 최전방으로 나르는

‘노가다’일을 했다. 그 것은 고달프기 짝이 없는 중노동이었다.




그러나 국군 포로들은 참고 탈출할 날을 기다렸다.

몇 개월 뒤 북한군의 감시가 느슨해졌을 때 드디어

탈출 지시가 조용하게 통보 되었다.

그들은 그간 북한군이 눈치 채지 못하게 식량들은 모아왔었다.




탈출 당일.

국군 포로들은 야간 점호가 끝나자 보초를 처치하고 무기고에서

무기를 꺼내 무장하고 남으로의 탈출 길에 올랐다.

그들은 하룻밤 내내 걸었다

그리고 다음날 오후 드디어 남쪽 국군 초소가 환히
보이는 곳까지 왔다.

“이제는 다 왔다 - ! 조금 만 더 가자."




허나 국군 포로들은 주 전선에 가까워 올수록 군대 배치 밀도가

조밀해져서 발각되기 쉽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이미 이들의 집단 탈주는 전선에 통보되어 북한군 일개 대대가
탈출로 차단 작전에 돌입한 뒤였다.

국군 포로병들은 바로 국군 초소가 남쪽으로 아스라하게 보이는
산자락에서 북한군에게 몇 겹으로 포위당했다


북한군은 투항을 권고하다가 공격하기 시작했다.

국군 포로들은 죽기를 한하고 저항했다.

김 진수 씨는 총탄이 빗발치는 상황에서 몸을 던져서  따발총을
난사했다.




그러나 그는 손과 가슴에 총탄을 맞고 쓸어졌다.

그가 정신을 차렸던 곳은 그 때 북한군 수중에 있던 화천의
북한군 야전 병원이었다.


탈출 포로 절반은 전사 해 버리고 나머지는 전부 다시 붙잡혀서

한참을 구타당하고 압송 되었다.

포로들은 원산으로 전원 보내져서 영창에 구금되어 엄중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중대장과 소대장, 그리고 인사계등의
신원이 발각되었고 군사 재판이 신속히 열렸다.




판결은 가혹했다.

중대장 이하 25명의 포로들에게 사형이 언도 되었고 그들은
하루도 안 되어 전원 총살되었다.


김 진수 씨도 사형을 구형 받았으나 나이도 어리고 중상을 입은 점이

정상 참작되어 무기형으로 감형 받았다.
복역 도중  20년 형으로 감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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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로서 감시 속에서도 장기간 지휘 체계를 그대로 유지하고

비밀을 지켜오다가 탈출을 시도한 것은 세계 포로 저항사에서

보기가 힘든 사례이다.


다른 예로서 한국 전쟁 때 미군 포로들은 중공군의 이간질로

지휘체계의 유지는커녕 서로 씹고 씹히는 추태를 보였다.


반면 터키군은 포로가 된 뒤에도 강철의 군기를 그대로 유지해서

세계의 찬사를 받았었다.


한국 국군 장병의 정신 교육의 귀감이 되도록

이 사건은 반드시 정확한 조사와 한국 전사에의 기록이
절실히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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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당한 포로들이 어느 정도 치료가 되자 그간 붙잡혔던 포로들을

더해서 4-500명의 대 부대가 원산을 출발하여 초가을이 된
북한 땅을 모로 가로 지르는 북상 길로 끌려가게 되었다.




이미 거지꼴이 된 포로들은 손을 뒤로 묵이고 한없이 걸었다.

트럭이니 뭐니 하는 운송 수단은 호사스러운 헛꿈이었다.

행군은 주로 야간에만 했다.
주간에는 하늘에 항상 떠있는 미군 전투기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사실 미군기의 공습도 두어 번 받아서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였다.




포로들이 전선에서 멀어지자 공습이 뜸해졌다.

행군도 야간보다 주간에 많이 하는 것으로 형태가 바뀌었다.

그러자 포로들은 또 다른 액운을 만나야 했다.

촌락을 지날 때면 촌민들이 몽둥이들을 들고 뛰쳐나왔다.




살기가 철철 넘치는 그들은 포로들에게 아우성을 쳤다.

“ 내 자식이 남조선 군대 놈들에게 죽었다. 이 개 같은 원수 놈들아 !

   너희들 내 손에 죽어 봐라 !”




비인간적인 북한의 40년 억류생활에서 돌아 온
국군 이등 중사 김 진수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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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손이 묶인 포로들은 그들의 살벌한 위협에 아무런
방어능력이 없었다.

호송병들의 제지로 물리적인 봉변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포로들은 공포에 떨어야 했다.




이런 일을 서 너 번이나 당하면서 이주 뒤에 평양 근교에 도착했다.  

끌려간 포로들은  북한에서 교화소라 부르는 형무소에 수감되어

수형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김 진수 씨는 단지 집에 가고 싶어서 강제로 편입되었던 북한군에서
탈출했다는 죄로 무려 20년의 세월을 이 북한 형무소에서
보내게 되었다.




그는 10년간 이 교화소에서 미싱을 돌리며 북한군과 북한 경찰의

제복을 만들었다.

교화소의 피복창은 북한군이나 경찰의 의복이라면 상하의와
외투는 물론 모자까지 다 만드는 거대한 것이었다.




이 곳에서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는 중노동을 했다.

잠이 부족해서 미싱을 돌리다가 미싱 바늘로 손가락을 박기도 했다.

그걸 다시 뻰치로 빼내고 간단히 약만 바르고 다시
작업 현장으로 내 몰렸다.




십년의 미싱공 생활이 지나자 교화소는 그를 황해도에 있는
광산으로 보냈다.

북한의 교화소는 법적인 교정기구가 아니라 노동력 착취의
생산기구였다.

이 광산도 교화소가 관리하던 생산 시설의 하나였다.

김 진수 씨는 여기서 광부로 다시 밑바닥 인생을 겪었다.


그 기나긴 20년 동안 북한 당국이 그에게 사시사철 매일 제공한
식사는 콩이 30%정도 섞인 사람 주먹만 한 주먹밥과 소금국이었다.
일이 없는 날은 크기가 아기 주먹만하게 줄어져서 나왔다.
그런 조악한 음식을 먹고 중노동을 하며 그는 20년을 버티었다.




그리고 20년이 훌쩍 지났다.

남자가 2,30대의 나이면  자연적인 짝을 찾아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가지는  생물로서 누려야 할 당연한 기본 권리는 북한이
반동분자로 낙인 찍은  김 진수 씨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그는 속절없이 늙어가는 노총각이 되어 버렸다.




20세의 젊은 나이로 조국의 부름을 받고 전쟁터로 보내진 그는
그 반대편 적측의 사회에서 전과자가 된 42살의 나이로 교화 소에서
출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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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20년의 세월이 버티어낸 김진수 씨의 정신력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물었다.

“ 그 긴 세월을  어떻게 버티셨습니까. 저 같으면 일찌감치
  자살했을 것 같은데요.’




김 진수 씨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나는 언젠가는 반드시 집으로 돌아간다 ―-! "

이런 희망을 ,최악의 경우에도  단 한 번도 버린 일이 없었습니다.

그 희망이 나를 버티게 해준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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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구형된 20년의 수감 생활을 다 복역하고 나올 때는 그래도

북한 당국에  약간의 기대감이 있었다.


" 아무리 북한 사회지만 그래도 내가 이렇게  고생했는데
   더 이상  고생스러운 곳으로는 안 보내겠지---."




20년간 죽을 고생을 한 인간으로서 당연한 기대감이었다.

그러나 웬걸 그가 교화소 출감 날 함경도에서 그를 데리러 온
저승사자 같은 인간이 교화소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동무, 출소를 축하 함다. 함경북도 샛별군 내무서에서 온 안전원

  김 oo 입네다. 동무는 샛별 탄광에 배치 받으셨수다.

  내가 그리로 안내 하갔소 .”


그는 하늘이 노래지는 것을 느꼈으나 방법이 없었다. ‘

그리고 그는 그가 안내 하는 대로 기차를 탔다.

죄수복이 아닌 평복을 입은 자유를 빼놓고는 그는 다시

제2의 교화소나 다름없는 탄광으로 향했다.




긴 기차 여행을 하면서 안전원 놈은 여러 설명도 해주었지만

이죽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동무! 그 곳에는 포로 출신도 많으니 만나면 반가울게요.”


그가 도착해보니 그의 말은 맞았다.

거의 광부들이 거의 국군 포로였다.

국군 포로를 일 만 명이나 붙잡아 놓고 돌려보내지 않았으니
그 말은 일리가 있다.


김 진수 씨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 북한의 광산업은 전부 국군 포로들이 일으켜 세운 겁니다. ”

김 진수 씨는 탄광에 도착하여 동료 포로들의 환영을 받고 자리도
배치 받았다.




그리고 나이 40이 넘어 다른 국군 포로가 소개 해주어서 자식이

두 명이나 달린 북한의 전쟁 미망인과 결혼했다.

그리고 두 해쯤 지나 아들도 하나 낳았다.




나는 그에게 북한 탄광에서의 국군 포로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물어봤다.

그는 탈주하다 교화소로 보내져 장기 수형 생활을 한
국군 포로들이 아닌 국군 포로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포로 수용소에 있었거나 북한군에 강제로 편입되었던
국군 포로들은 전쟁이 끝나자 전원 제대를 시켰다.

그리고 그때 북한 돈 만원씩의 거금을 지급 받았다.

그 돈은 상당한 거금이었다.


돈을 주는 북한 당국은 그 돈이 집도 사고 마누라도 얻고 하는

사회 정착금이라고 했다.

국군 포로들은그 푸짐한 돈을 받고  집에 돌아가지 못할
신세가 되었지만 그런대로 마음의 위안을 받았다고 했다.


그래 놓고 국군 포로의 대부분은 북부 북한의 모든 탄광에 보내졌다.

그 따위 정착금이 아니라 천금을 준다고 해도 가려는 사람이

많지 않았을 지하 탄광으로 보내졌던 것이다.  




북한이 잘 나가던 80년 대 까지도 국군 포로를 억지로 만든
광부에 대한 대우도 나쁘지는 않았다.

매일 아침 돼지 고기가 곁들인 아침 식사가 주어졌고 광부 가족에는

한 달에 6킬로의 돼지고기와 20킬로의 생선이 주어졌다.

설탕도 4킬로씩 배급 되었다.

식량으로 주는 옥수수도 질 좋은 것만 주었다.

주 6일 근무에 일 년에 한 달씩 휴가월이 주어졌다.




그러나 이렇게 좋아진 대우 이면에는 국군 포로의 피 흘리는

투쟁이 있었다.




1960년대 아오지 탄광에서 국군 포로들의 대 저항이 있었다.

고향에도 보내주지 않고 강제로 탄광에 보내 고생시키는
북한 정권에 대한 불만만 큰 것이 아니었다.




북한에서 국군포로란, 인종 차별이 심했던 미국에서의 흑인이나

조선시대의 세습 노비, 그리고 인도의 불가촉 천민들의 그것과

비슷한 존재였다.




자식들이 당에 입당하는 것이나 공무원이 되는 것도 불가능 했던

했던 것은 기본이었다.




국군 포로가 북한 사회 일반에서 받는 멸시와 천대 그리고 감시를

매일매일 고달픈 삶의 모서리마다 살 떨리게 당해야 했다.




주변 이웃도 국군 포로들을 사람 취급을 안했고 탄광의 간부들,
그리고  내무서나 군청 같은 곳에서도 포로라면 경멸의 태도를
노골적으로 먼저 깔고 일을 시작했다.




고향에 못가는 것도 서러운 국군 포로로서 이런 천대와 모욕은

참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국군 포로들의 적개심은 극에 달했다.

아오지의 탄광 국군 포로들은 인간적인 천대에 보복 할 모의를 했다.

목표는 자신들을 멸시하고 괴롭히는 악질 탄광 간부들이었다.




김 진수씨 표현에 의하면 국군 포로들은
“너 이 새끼들, 한 번 죽어 봐라!”라고 결행했다고 했다.




그리고 국군 포로들은 몰래 발파용 폭약을 모아서 아오지 탄광의

주요 갱도에 설치하고 폭파시켰다.

이 폭파로 탄광 간부 포함해서 무려 백여 명이 죽었다.




국군 포로들이 적국인 북한에서 펼친 저항운동은 비통한
결말을 맺었다.

놀란 북한 당국은 안전원을 동원하여 철저한 수색에 들어갔다.

결국 폭파를 모의했던 국군 포로 45명이 체포되고 재판을 거쳐
전원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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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북한에 의해서 강제로 납북된
국군 포로들은 그저 수형 생활만 한 것이 아니라 앞에서
이야기 한 대로 북한에 격렬히 저항했다.

국군 장병으로서 할 바를 한 것이었다.




지금 70명 이상 되는 국군 포로들이 귀환했는데 한국 국방부 소속
전사 편찬 위원회는 귀환 포로들로부터 이와 같이 북한의 부당한
억류와 학대에 저항 했었던 국군 포로들의 사례들을 모두 수집해서
국군 전사기록에 남겼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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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이 있고 얼마 안 되어 김일성이가 아오지에 왔었다.

이 사건을 기억하고 있던 김 일성은 앞으로 광부들에게는
적어도 먹는 것만은 조종사 수준의 대우를 해주라고 했고 이 지시가
그대로 시행되었다.




물론 이런 후대는 북한의 경제 사정이 좋았던 80년대 까지였다.

90년대 들어와서 배급이 조금씩 줄어들고 드물어지더니 요즈음은
돼지 고기는커녕 기본적인 쌀이나 옥수수마저도 배급이 끊긴지 오래다.




배급 당국에 항의하면

“ 난들 위에서 안 주는데 별 수가 있냐? 알아서 자활하슈!”

라고 했다.




그 것이 시장 경제 아닌 배급 경제의 시스템위에서 움직이는 북한

정권의 말단 관리가 하는 소리니 북한은 지금 볼 짱 다본 상태로

가고 있는 듯하다.

하여튼 이렇게 한 때나마 국군 포로 출신 광부들에게  대우가 좋
아졌던 이유 같은 근거가 있었던 것이다.




김 진수 씨는 북한 사회에서 겪는 인간적인 모멸감도
모멸감이었지만 안전원들에 의한 밤낮을 가리지 않는 감시 역시
국군 포로들을 괴롭게 만든 것이었다고 했다.




개인 이력부가 치밀하게 작성 되어 있어서 국군 포로들의  

일거수 일투족이 모두 기록된다.

그 뿐인가 3호 연호제, 5인 연호제등이 있어서 모든 주민의
정보를 내무서에 보고하게 되어있다.

그런 보고체제가 치밀하게 되어 있어서 100호 촌락이라면

20여 호는 그런 내무서의 연락망원으로 보면 되었다.




교화소 20년의 끔찍한 고통을 겪은 김 진수 씨는 이런
비밀경찰의 체제에서 극도의 말조심을 했다.

그는 친한 친구와도 정치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고
주로 먹는 이야기만 했다.




이와 같이 지독한 감시 체제가 80년대가 되고 포로들이
나이를 먹고 그 곳에서 자식도 낳고 하자 완화되었다.




김 진수 씨는 이런 수모와 조심을 하며 전처가 데려온
자매도 결혼시키고 자기 아들도 결혼시키고 환갑을 넘는 해
광산에서 해방되었다.?

환갑이 되면 은퇴하는 북한 규정 때문이었다.

북한 공산정권에게 40년을 넘는 착취와 박해에서 다 늙은 몸으로

해방 된 것이다.




북한의 40년 강제 노동이 만들어  놓은 김진수씨의 손.
혹독한 노동에 손톱이 다 닳아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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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의 정보를 듣는 것은 전혀 불가능했다.

남쪽의 방송을 듣다가 발각되면 가차 없는 중벌을 받았기에

남쪽 방송 듣는 것도 감히 시도를 하지 않았다.




김 진수 씨의 말에 의하면 라디오 감청 탐지기가 있어서
늦은 밤에 이것을 가진 안전원들이 마을을 배회했다고 했다.




그래서 그가 북한에 있는 동안은 감히 한 번도 남한 방송을
듣지 않고 북한 방송을 통해서 남한 소식을 전 해 들었다.

40년이 넘도록 북한이 하는 소리는 마냥  꼭  같았다.




남한 도시 역전에 거지들이 우글거리고 해마다 굶어죽는

기아민들이 수도 없고 미국 놈들이 아무 집이나 들어와서

여자들을 강간한다는 이야기였다.




김 진수 씨는 남한이 굶주림에 시달리는 선전만은 믿지를 않았다.

“남한에  넒은 땅이 그렇게 많은데  설마 -----”




남한 인민들이 식량을 착취당하고 굶어 죽는 아사자가 엄청나게

많다는 이야기는 북한에 그 심한 기아가 몰려온 90년대도 뻔뻔하게 계속되었다.




남한에 대한 어떤 정보도 들을 수도 없었고 그대로 세월이 갔다.

탄광촌인 그 곳까지 중국 동포 보따리 장수들이 들락거렸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남한에 대해서 들을 정보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올림픽이 지나고 나서 그들의 입을 통해서 남한의 사정이

조금 씩 들려왔다.

이미 등소평의 개방정책으로 남한과 교류가 개시되면서

실상이 알려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느 날 김 진수 씨는 호젓한 곳에서 중국에서 온 장사꾼을
만나게 되었다.

김 진수 씨는 주위를 돌아보고 은밀히 물었다.

고향 소식이 간절했던 터였다.

“ 남 조선은 어떻게 산답디까 ?”

동포는 역시 주위를 둘러보며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 했다.

“ 중국보다 이미 3-40년 더 앞서가고 있다고 합디다. 다녀 온
   조선족사람들이 많소. 남조선에 가보니 눈이 번해 지더랍니다.”


그 때부터 김 진수 씨는 남한의 사는 형편에 대해서 조금씩
듣기 시작했다.

더구나 악화 일변도를 달리는 북한의 식량사정이 그를 더욱 고향을
사무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미 70의 나이를 넘긴 지천명의 나이, 그간 자신을 버티게 해준

귀향의 의지는 이미 기진맥진 한 상태였다. 그저 1951년 7월에 떠난 고향의 집이 꿈에 나타나게 그리울 따름이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났다.

북한의 식량난은 미칠 지경으로 악화되었다.

김 진수 씨는 나이 7순에 정부 관리 말대로 자활의 길을 찾아야 했다.

김 진수 씨는 사람들이 잘 오지 못할  깊은 산 가파른 사면에 옥수수

밭을 일구었다. 그리고 해마다 댓 가마씩의 옥수수를 수확해 먹었다.

그러나  식량난이 가속화되자 좀도둑들이 들끓어 옥수수는 익기도 전에

전부 도둑질해갔다.




사흘 굶어서 남의 집 담 안 넘을 사람이 없다는 말이 정확하다는
말이 그대로 통용되는 곳이 지금의 북한 실정이다.




북한 당국은 각종 도둑이 창궐하자 군 단위로 20여명 씩 범죄자를

모아서 강변이나 산자락에서 집단 총살을 집행했다.

주민들은 그 끔찍한 모습을 강제로 가서 보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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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한  금강산 총격 사건의 이면에는 이 지경으로 사람들을
쉽게 죽이는 북한의 살인 문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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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남한 쌀이 들어온다는 말도 들었고 방송에서도 남조선에서
인민들이 굶어 죽는다는 말도 슬그머니 없어졌다.

김 진수 씨는 운이 좋아 그 남한 쌀을 맛보았지만

그는 대부분의 쌀이 군대로 간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도둑들 때문에 농사도 어렵게 된 김 진수 씨는  아내와 함께
살길을 찾아 옥수수 술을 밀주로 빚어 팔기도 하고

두부나 옥수수 엿도 만들어 팔았다.

두 늙은 내외는 노구를 이끌고 정신없이  삶과 투쟁을 하였다.




그렇게 살던 어느 날 고향이 대전인 국군 포로 박 평구라는 분이

술을 마시러 놀러 왔다.

같은 포로 출신으로서 김 진수 씨와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그 무렵 그는 어쩐지 돈을 잘 쓰고 다녔다.




그는  술이 오르자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야 -! 너 고향 주소 지금도 기억하나?”

그걸 잊을 리가 있는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들 이름도?”




그는 물론 기억하고 있었다.

절대 잊을 수 없는 피붙이의 이름이었다.

그러자 박 평구 씨는 몇 푼의 달라를 보여주었다.


“ 너 딸라 갖고 싶지? 이 딸라 좀 봐라”

그리고 김 평수 씨의 친필로 고향 주소와 동생들 이름을
적어 달라고 했다.

김 평수 씨는 그가 해달라는 대로 해주었다.

그리고 반달 쯤 지났던가----------?




박 평구 씨가 밤에 나타났다.

어느 조선족 보따리 장사와 함께였다.

그가 내미는 것은 천 달라가 넘는 달라와 동생들의 편지였다.

김 진수 씨는 돈 보다도 동생들의 편지를 가슴이 미어 터지는

기분으로 읽고 또 읽었다.




그는 그 것을 가져온 조선족을 통해서 다시 사진과 편지를 보냈고

한 달 쯤뒤에 다시 답장이 왔다.




그리고 그렇게  되어서 중국에 와서 동생들을 만난 김 진수 씨는

여러 사연을 겪고 생각지도 않게 가족들을 놔두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무려 53년만의 귀국이었다.

그리고 1사단에서 아주 늦은 전역식을 했다.


너무도 늙은 나이에 고향 경기도 화성 시에 돌아온 그는 상전이

벽해라는 옛말을 실감하며 고층 아파트 촌으로 변한 그의 고향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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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kr.blog.yahoo.com/juneki82/MYBLOG/yblog.html?pc=1

위의 주소를 클릭하면 국군 포로들이 피와 눈물로  건설했고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이 6.10 선언을 위해서 만난 순안 공항이
나온다.
동영상은 고려 항공의 판촉용 가라오케 비디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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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글쓰기 (43)  

전쟁포로의 비참한 현실이죠. 스탈린그라드에서 소련군에게 포로로 잡힌 91,000명의 제6군 병력이 시베리아의 동토로 끌려가 귀국했을 때는 단 6,000여명 수준이었으니 말이죠  

08/07/14 (월) 오전 11:31    

아, 길고 긴 이야기. 너무나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08/07/14 (월) 오전 11:48   [bluefire]  

국군포로 이야기 나올 때마다 가슴이 아픕니다. 사실 그냥 군복무 자체도 얼마나 힘든데, 하물며 전쟁시 목숨 다하여 싸운 분들을 이렇게...미국 행위 물론 괘씸하기도 하지만, 왜 유독 미국과 관련된 사항에만 촛불이 빛나야만 하는지? 이런 분들 인권을 위해서라도, 이런 분들 한국에 데려오기 위해서라도 촛불이 밝혀질 순 없을까요?  

08/07/14 (월) 오후 5:46   [하마]  

아아... 너무 가슴아프네요 ㅜㅜ... 오늘 밤 좀 길어질 듯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부분의 이야기는 보안상 문제가 있어서 축약하신 것인지 궁금하네요.  

08/07/14 (월) 오후 8:49   [태엽] from 218.235.36.32

아아... 너무 가슴아프네요 ㅜㅜ... 오늘 밤 좀 길어질 듯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부분의 이야기는 보안상 문제가 있어서 축약하신 것인지 궁금하네요.  

08/07/14 (월) 오후 8:50   [태엽] from 218.235.36.32

잘보고갑니다~~  

08/07/14 (월) 오후 10:18   [BlogKiller]  

포로들에 대해 보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않았다는데  

08/07/15 (화) 오전 12:14   [띠리리]  

가슴이 아픕니다. 줵일놈 !!!  

08/07/15 (화) 오전 1:25   [river]  

촛불좀비들이 국군포로를 위해서 촛불을 밝혀요?? 어림도 없습니다... 전세계 유일의 좌빨 빨갱이들이 하는 촛불이 북한에 욕되는 짓을 할리가 없죠...  

08/07/15 (화) 오전 2:08   [촛불반대] from 222.119.255.197

참 이상하죠? 걸리지도 않는 광우병때문에 촛불을 밝히지만 국군포로들을 위한 촛불은 하나도 없죠. 심지어 미국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시체까지 다 가지고 가는데 우리나라는 무관심(요번에 미군은 한강에 빠진 조종사시체를 찾기위해 다시왓다는데) 정말 한심하네요들..  

08/07/15 (화) 오전 2:51   [ㅉㅉㅉ] from 76.245.58.68

참 이상하죠? 걸리지도 않는 광우병때문에 촛불을 밝히지만 국군포로들을 위한 촛불은 하나도 없죠. 심지어 미국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시체까지 다 가지고 가는데 우리나라는 무관심(요번에 미군은 한강에 빠진 조종사시체를 찾기위해 다시왓다는데) 정말 한심하네요들..  

08/07/15 (화) 오전 2:51   [ㅉㅉㅉ] from 76.245.58.68

글을 읽으니 아버님 생각이 난다.  

08/07/15 (화) 오전 4:15   [솔리스트] from 58.141.145.136

정말 잘보고갑니다. 저도 거의 20년전에 군복무를 마친사람이지만, 우리나라를 지키기위해 선배 전우들이 저렇게 고생했는대 대우를 못받는 현실이 정말 안타깝습니다. 지금이라도 정부가 국군포로송환과 이름없이 사라져간 선배전우들의 시신이라도 우리땅에 묻힐수있도록 최선을 다하시길 바랍니다  

08/07/15 (화) 오전 5:05   [충성] from 74.13.131.206

정말 잘보고갑니다. 저도 거의 20년전에 군복무를 마친사람이지만, 우리나라를 지키기위해 선배 전우들이 저렇게 고생했는대 대우를 못받는 현실이 정말 안타깝습니다. 지금이라도 정부가 국군포로송환과 이름없이 사라져간 선배전우들의 시신이라도 우리땅에 묻힐수있도록 최선을 다하시길 바랍니다  

08/07/15 (화) 오전 5:05   [충성] from 74.13.131.206

그 촞불시위하는 비용으로 김진수 씨 같은 애국자들 남은여생 고생핞고 살수잇는 보상금이나 지급했슴바램임니다 .시위하는 인간들아 정신 차려라.
쇠 고기 안쳐먹으면 되지 할짖이 없어서 데모하고 지랄이냐 그런 인간들
이북에 가서 굴머봐야 대한민국 생각 할거다.  

08/07/15 (화) 오전 5:58   [soph384] from 67.180.74.92

동존상잔의 비극의 현실은 지금도 북한에서는 진행중이다. 우리는 과거의 일로 생각된다. 그 것이 잘못된 것은 누구나 잘안다. 이것을 지적하면 인권운동하는 진보나 보수냐로 서로 으르렁거리고 나누지는 남한의 잣대를 김정일은 즐기고 있다. 이것을 남한 사람들은 정확히 알아야 한다.  

08/07/15 (화) 오전 6:53   [ecophalt21]  

동존상잔의 비극의 현실은 지금도 북한에서는 진행중이다. 우리는 과거의 일로 생각된다. 그 것이 잘못된 것은 누구나 잘안다. 이것을 지적하면 인권운동하는 진보나 보수냐로 서로 으르렁거리고 나누지는 남한의 잣대를 김정일은 즐기고 있다. 이것을 남한 사람들은 정확히 알아야 한다.  

08/07/15 (화) 오전 6:55   [ecophalt21]  

산사람님께서 다시금 동족애를 일깨워주는글 잘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코너에 언제나 반갑지않는 댓글 불청객인, 나찌에 미쳐 동문서답을 하는 쓰레기 같은 만슈타인이라고 스스로 칭하며 노는 유진우같은자를 보면 자기자랑에 도취되어있는 미친인간의 현주소를 봅니다.  

08/07/15 (화) 오전 8:00   [에릭 마리엔탈] from 121.177.15.65

주의와 사상, 전쟁등,인류의 역사에 현현한 사실을 바르게 보는 눈과,바르게 듣는 귀와, 바르게 깨닿는 마음을 우리가 가져야 하는 데..........
우리 동포여! 어찌 할꼬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인류의 전쟁과 평화의 역사를, 바르게 보는 눈과, 바르게 듣는 귀와 ,바르게 깨닿는 마음을,우리에게 주소서 ......  

08/07/15 (화) 오전 8:04   [pillbong] from 122.49.136.250

아아... 너무 가슴아프네요 ㅜㅜ... 오늘 밤 좀 길어질 듯합니다;;;  

08/07/15 (화) 오전 8:36    

이곳의 주인장에게 고마움을 전함니다, 저희들국군의 6.25에 고생하신분 치가 떨리는군요, 저는 1966년 논산군번입니다, 자대에 가니 6,25참전의 고참 중상사분들의 제대특명에 귀향비조차도 없어서 15원인가 군봉급에서 십시일반 갹출하여 고향에 돌아같습니다, 고생을 모르는 지금세대 걱정도 됨니다,  

08/07/15 (화) 오전 8:38   [안영일] from 71.58.183.106

가증스럽게도 정의를 외치는 그 마귀들이 결코 이런 일에 촛불을 들 리 없지요.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반역이니까. 그런만큼 이 빨갱이들의 정체를 하루 빨리 간파하여 모두 처단해야 합니다. 그것이 이 정권이 마땅히 해야 할 절체절명의 과제입니다.  

08/07/15 (화) 오전 9:08   [멸공] from 211.173.40.129

선생님같으신분들의 가슴에서 온몸에서 흘려진 피로 이나라가 지금 이렇게 건재해있음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정말고맙습니다. 많이 건강하신 몸으로 행복하게 오래 사셨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08/07/15 (화) 오전 9:44   [존경] from 116.42.2.13

여기 댓글에 촛불비하하는 사람들 . 생각이 다르니 비하하는것까지 뭐라 할 마음 없으나 촛불을 마귀니 빨갱이니 북한을 위한다느니 따위의 정신병자같은 왜곡은 안했으면 합니다. 당신들 말하는 모양새가 몰살이니 처단이니 하는것이 곡 당신들이 정말 빨갱이들같이 여겨져 무섭습니다~ 촛불들이 언제 몰살이니 처단이니 하는걸 봤는지요~  

08/07/15 (화) 오전 9:54   [존경] from 116.42.2.13

눈물이 납니다!  

08/07/15 (화) 오전 10:00   [니모]  

정말 슬픈 민족의 아픔이죠이런 사실을 왜 노 정권에서는 숨기려했는지...
이런 이야기가 제발 전쟁과 이산의 슬픔을 앉고 이제 황혼의 저너머를 기다리는 분을 위해 널리알려지길 바랍니다.
정말 좋은 글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김진수씨 이제껏 못다한 행복을 누리시고 특히 맛있는 음식 많이 많이 드세요  

08/07/15 (화) 오전 10:01   [kssikya]  

정말 슬픈 민족의 아픔이죠이런 사실을 왜 노 정권에서는 숨기려했는지...
이런 이야기가 제발 전쟁과 이산의 슬픔을 앉고 이제 황혼의 저너머를 기다리는 분을 위해 널리알려지길 바랍니다.
정말 좋은 글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김진수씨 이제껏 못다한 행복을 누리시고 특히 맛있는 음식 많이 많이 드세요  

08/07/15 (화) 오전 10:02   [kssikya]  

산사람님 블러거에 들어오면 또 다른 몰랐던 세상이 보입니다.
촛불때문에 몇달동안 나라가 시끄러웠는데 그 와중에도 이런 좋은 글을 올려주셨군요.
화성까지 오셨으면 동탄에도 좀 들러보시지요.
혹시 압니까..제가 고물차로 안내도 하고 사진도 찍어 드렸을지...  

08/07/15 (화) 오전 10:14   [황태]  

정말 눈물나네. 그들의 피가 없었다면 오늘의 우리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08/07/15 (화) 오전 10:27   [limst44] from 61.78.102.87

사기꾼 최용중이를 알고있는 친구,가족 및 친척분들은 이글을 보시고 연락을 주십시오.
남의 가정을 뿌리채 흔들면서 까지 살아가는 최용중…..
너의 자식들이 이글을 보고 평생 아빠인 너를 원망하며 살아가도록 할것이며
잡히는 그날까지 너의 사진을 한국전역의 인터넷에 보낼것이다.
처: 이미선 (1969년7월3일생)
자녀: 최은주 (1995년1월29일생)
최현주 (1998년8월23일생)  

08/07/15 (화) 오전 10:38   [블루드라]  

정말 감명깊게 잘읽었읍니다 읽고나니 술한잔 생각나는군요 구구절절 가슴이 아려오는군요 부디오래 오래 건강하시고 통일되는 그날에 살아 역사를 증언하시는 산증인의 한 귀한분으로 모셔지기를 기도드리겠읍니다"  

08/07/15 (화) 오전 11:07   [김민곤]  

정말 가슴이 찡하네..이런 분들이 지킨 대한민국인데..촛불시위에 참기하는 놈/시기들은 모두 대한민국의 적이니 모두 박살내자.건강하게 행복하게
남은 여생을 지내시기를 발원합니다.  

08/07/15 (화) 오전 11:07   [배용원] from 59.6.198.193

참 서벌눔들 어찌해야 하는기야 이거 후아아악 죽이 버릴수도 없고 말이야
도대체가 어드러케 해야 되는기야 아잉 조옹 간나이 시키들 말이야.  

08/07/15 (화) 오전 11:14   [hwang3080] from 61.109.111.176

선배 전우들의 용기있는 복귀를 환영하며 선배님들의 북한에서의 군공이 언젠가는 빛을 발하기를 빕니다.  

08/07/15 (화) 오전 11:14   [흑기사]  

감사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듣고 알아야 하는데, 너무들 철이 없이 아는 것만 있어서 교묘한 논리로 나라를 어지럽게 하지요..님 감사합니다...애국하십니다..  

08/07/15 (화) 오전 11:23   [산마루] from 124.61.198.136

잘봣입니다 한인생 누굴위하여 이리살아야 하는가 사상자체가싷어지네요 울나라는 잘사는 것같지만 넘 자신만을위해서 사는것같아요 조금만 덕이된다싶으면 배반을밥먹듯 하니 군군포로 님수고하셧읍니다 살아있으니 가족 보고오래사시고 행복하세요  

08/07/15 (화) 오전 11:33   [양춘복]  

담아가도 될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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