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산한 갈대밭을 배경으로 자전거를 타던 소년과 소녀. 남루한 옷차림, 삐쩍 마르고 그을린 얼굴로 잠시나마 옅은 미소를 짓는 소녀의 손이 스르르 풀리며 자전거에서 떨어진다. 놀라 자전거를 멈춘 소년이 달려가지만 소녀는 미동이 없다. 순수한 첫사랑의 감정을 품었던 소년과 소녀는 그렇게 생사를 가르는 참혹한 수용소의 현실 앞에서 이별한다.
장내는 ‘아’라는 탄식과 함께 흐느낌으로 가득찬다. 스크린에 못박힌 듯 시선을 고정하던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의 손이 슬그머니 눈가로 올라간다. 미묘하게 떨리는 손수건으로 눈가를 지그시 누르는 박 전 대표의 얼굴은 어둠만큼이나 슬프고 무거웠다.
2002년 탈북자들의 베이징 주재 스페인 대사관 진입 사건을 소재로 제작된 ‘크로싱’ 시사회가 열린 27일 국회 의원회관 대회의실은 우리의 방관으로 사지에 몰린 북한 주민들의 일상과 고통에 차마 소리내어 울지 못하는 괴로움과 눈물로 채워졌다.
좌석은 물론, 입구와 통로까지 빽빽이 들어찬 참석자들은 ‘크로싱’에 대한 우리 국민의 높은 관심을 짐작케했다.
“비록 상업적인 영화는 아니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며 우리 국민들에게 울림을 주는 영화이길 바란다”는 김태균 감독의 말처럼 2시간 남짓한 영화 상영시간 동안 참석자들 모두는 같은 꿈과 희망, 절망과 아픔을 품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혹한 일들이 이 순간에도 우리 민족에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너무나 가슴이 아파서 애써 피하고 싶은 진실을 지금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을 계기로 남북문제를 새롭게 생각하는 기회가 되길 바라며, 참으로 중요한 주제이지만 만들기 쉽지 않았을 이 영화를 만들어 주신 감독과 출연자, 제작진에게 감사와 국민 여러분의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차마 눈 감고 싶은 진실’이라고 표현했던 박 전 대표는 아픈 아내와 굶주리는 아들을 위해 도강하는 아버지와 그를 찾아나선 열한살 아들, 준이의 엇갈림에 눈시울을 붉혔다.
‘크로싱’은 관객에게 울음을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묵묵히 그리고 성실하게 평양 밖 북한 주민의 일상을 응시한다.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연애를 하고 사랑을 나누는 단란한 가족의 풍경부터 ‘살아남기 위해’ 잠든 사람의 신발을 뺏어 신고 먹을 것에 승냥이처럼 덤벼드는 꽃제비들, 함께 도강하다 끌려가는 사람을 보며 내가 아니라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리는 탈북자들, 변절자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임신한 배에 주먹을 내리꽂는 보위부의 폭력을 감내해야 하는 수용소의 주민들의 모습까지 TV가 보여주지 않았던 사각지대 속의 북한의 모습을 담담히 그린다.
◇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가 27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서 진영 의원이 주최한 영화 ´크로싱´ 국회시사회에 참석, 영화가 시작되길 기다리고 있다.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북한의 일상을 그런 것이었다. 울음도 허용되지 않는 공포와 투쟁의 연속, 살아남고자 하는 욕망이 가득찬, 그래서 지옥보다 더 지옥같은 현실. 주전부리가 없어 고봉밥에 간장을 비벼먹고 산나물 찬이라도 배불리 먹었으면 하는, 우리에게 지나간 과거가 그들에게는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돈이 원수”라는 푸념도 북한에서는 사치일 뿐. “꼭 돌아올테니 어머니를 잘 돌봐드리라”며 아들의 찢어진 운동화에 먹먹한 아버지의 등은 힘이 없다. “고기냄새만 맡아도 배부르다”는 탄광 노동자의 농 속에는 자조와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두려움이 숨어있다.
아버지와 빗속에서 공을 차며 즐거웠던 한때가 유일한 희망이자 버팀목인 11살 소년은 “죽음 다음에 또다른 세상이 있다면 아버지, 어머니와 같이 살고 싶다”며 “그곳에서도 비는 있었으면 좋겠다”고 손에 잡히지 않는 평온을 갈망한다.
극한의 슬픔 앞에서는 눈물조차 마른다고 했던가. 병들어 죽은 이웃을 보는 주민들의 메마른 시선 앞에서, 어린 몸으로 고된 여행길을 자처하는 아이에게 “갈 데는 있니”라는 말로 붙잡지 못하는 손을 원망하는 안타까운 목소리에서, “하나님은 잘 사는 나라에만 사는 게 아니냐”는 무기력한 울부짖음에서 끊어질듯한 통곡을 가슴으로 읽는다.
아들이 아끼는 개를 잡아 주린 가족에게 먹이고 아들의 원망을 쓴물처럼 속으로 되삼키는 아버지가 남한에 정착한 이후 아들을 위해 축구공을 사고 아픈 아내를 생각하며 결핵약을 사모으는 모습에서 그들이 사지로 가는 행군을 하는 동안에도 배부른 투정으로, 오만한 동정심으로 내려다 보던 우리가 새삼 부끄러워졌다.
자유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용인해야 한다고 말하는 오늘이, 남을 깎아내리지 못해 안달인 지금이, 그래서 살아 숨쉬는 공기에도 당혹스런 순간, 장내는 심해같은 침묵과 흐느낌으로 젖어들었다.
탈북에 성공하는 모습에 박수치고, 갈 수 없는 이상향에 손조차 뻗어보지 못하고 스러진 사람들의 모습에 미안한 눈물로 대신했던 2시간. “대한민국 국민이라서 부끄럽다”를 입에 달고 다녔던 당신이라면, 대한민국에 태어나서, 호오를 표현할 자유가 있는 이 땅에서 살아갈 수 있음에 새삼 감사를 느길지도 모른다.
꿈보다 밥이 좋은 그들에게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응원은 조금 더 견뎌주기를, 그리고 내일 일어나지 못할까 겁에 질려 잠드는 밤이 아니라 안온한 휴식의 밤이 빨리 앞당겨지기를 기원하고 지켜보는 것. 그것이 참혹한 인권 유린의 방임자가 된 우리의 업보이자 책임일 것이다.
탈북이 새삼스럽지 않은 2008년. 돌아갈 수 없는 예전의 행복을 보여주는 ‘크로싱’의 마지막 장면은 우리에게 던지는 물음일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잘 살고 있는지’ 그리고 ‘북한주민의 안녕이 모두의 안녕인지’. 원초적인 질문 앞에 당신의 답은 온전히 당신만의 몫. 그러나 알량한 우리민족끼리식의 답은 아님을 증언하는 영화는 너무 깊어서 조심스런 울림으로 다가온다.
한편 이날 시사회에는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를 비롯해 이상득 국회부의장, 한나라당 이군현·허태열, 통합민주당 박병석 의원 등이 참석했다. 특히 대북정책의 주무부처인 통일부 홍양호 차관이 참석해 눈길을 끌었으며 북한민주화위원회 등 탈북자 및 북한인권관련 18개 단체 관계자와 독일인 출신 북한인권운동가 노베르트 폴러첸 박사 등이 자리를 함께했다.
[변윤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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