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비밀
  
 
   U.S. NEWS  
(신앙간증수기)이민 목회자의 아내(3)-임재순 지음 5/12/2010

 

우편물
 
    기숙사에 우편물 하나가 와 있다고 했다. 나는 우편물을 가지러 사
감실로 가서 우편물을 개봉하였다. 기숙사생에게 오는 우편물은 어떤
것이든지 사감 앞에서 검열을 받아야 하는 규칙이 있었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는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몹시 궁금했다. 우
편물을 뜯어보니 책 한 권이 있었다. 어머니는 어느 여인의 신앙간증
기를 읽으시고 은혜가 되어 나에게도 보내 주신 것이다.
    어머니는 딸에게 당부를 하였다. 너도 이 여인처럼 훌륭한 여성이
되라는 말씀이셨다. 나는 깜짝 놀랐다. 어머니는 나의 심정을 알지 못
하고 계셨다. 나는 가난을 헤치며 이겨 나가고 있었다. 장래에도 가난
한 삶을 되풀이 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머니는내 심정을
너무나 모르고 정말 너무한 것 같았다.
    나의 꿈은 장차 부잣집으로 시집가서 부모님을 호강시키고 각박한
우리의 환경을 바꾸는 것인데, 가난과 더 씨름하라구?
    나는 그 책을 집어 던졌다. 너무나도 야속했다. 딸의 심정을 이렇게
도 물라주다니‥‥‥‥ 그렇게 얼마간의 세월이 흘렀다
    어머니께로부터 편지가 또 왔다. 해답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돈도
얼마간 보내 주셨다. 나는 던져버렸던 책을 다시 찾아 읽기 시작했다.

그 내용은 방애인(당시 전주 기전여학교 교사)이라는 주인공이 그리스
도의 사랑으로 불쌍한 고아들과 문둥병자를 위로하며 사는 내용이었
다.
     나는 울기 시작했다.
     '어머니 ! 나는 이런 일을 할 수 없어요. 무서워요. 세상에 이런 여인
도 있단 말이에요? 소름이 끼치는군요. 나는 남들이 말하기를 미인이
라고 해요. 세상에 태어나서 하고 싶은 일도 하고 먹고 싶은 것도 마음
대로 먹고 살기를 원해요. 왜 굶고 살아요.
    나는 돈을 가지고 불쌍한 사람을 도우면 도왔지, 왜 장애인과 같이
몸으로 사랑과 희생을 해야만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독후감
을 편지로 어머니께 보내야 했지만 도저히 편지를 쓸 수가 없었다. 어
머니의 기대에 어긋나는 내 입장을 보일 수가 없어서 차일 피일 미루
다가 방학이 되었다. 몇 달 동안 답장도 없이 우물쭈물 하고 있었던 것
이다. 어머니께로부터는 다시 편지가 오지 않았다. 방학이 되어 집으
로 내려갔다.
    어머니는 반가이 맞아 주셨다. "제법 컸구나! 이젠 처녀틀이 잡혔
어!" 어머니는 나의 머리와 등을 쓰다듬으시면서 대견하게 생각하셨
다. 그날 밤 어머니는 책에 대한 소감을 물으셨다.
    나는 솔직하게 대답하였다. "어머니! 나는 부자로 살고 싶어요. 사
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일생 고생만 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단 말이에
요.'
    어머니는 알았다는 표정을 내게 보여 주셨다. 어머니는 내가 신앙
이 없어서 그러니까 기도해야겠다는 표점이졌다. 그렇게 얼굴에 씌어
있었다. 나는 방학 동안 어머니의 생활을 엿볼 수 있었다. 어머니는 두
벌 옷을 두지 않고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고 식사를 할 때에 
거지가 동냥을 하러 오면 자신의 몫을 몽땅 거지에게 주는 것이었다. 차
 마 배가 고파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셨다. 밤에 길가던 나그네가 찾아
 와서 유숙을 요청하면 언제나 맞아 주셨다.
     한마디로 사랑의 은사를 받으신 훌릉한 분이었다. 이와 같은 훌릉
 한 신앙인인 어머니의 행동에 찬사를 보내면서도 내게는 이해되지 않
는 점이 있었다. 길손에게 잠자리를 허락하는 어머니의 사랑의 행위에
비위가 틀렸던 것이다.
    나는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고 큰집으로 뛰어갔다. 동생들은 어머
니와 함께 자고 있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머니의 사랑의 행동에
질려버린 나는 방학이 지루하기만 하였다. 빨리 개학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나의 동생들은 나보다 더 귀한 믿음을 가진 편이었기에 순종하고
있었다. 나만 어머니의 행동에 민감한 편이었다. 나는 훌륭한 어머니
의 신앙을 본받지 못하고 고귀한 사랑과 희생의 정신을 지니고 실천하
는 그 행위에 대해 불평을 했다.
    후일 나는 이런 문제로 인해서 '사회봉사를 위해 살 것인가?' 가 나
의 기도 제목이었고, 심지어 죄의식에 사로잡혀 허덕이고 있었다 정
말 나의 사명이 고아원 보모인가를 여러 번 생각했다.
    어려운 일만 닥치면 나는 언제나 하나님께 문제를 놓고 기도하였다.
그러므로 오히려 환난이나 시험을 통해 더욱 하나님과 가까이 되어짐
을 체험하게 되었다. '화가 복이 되는구나!'라고 생각하니 막혔던 가
슴이 시원해지는 듯 싶었다. 수난과 고통은 자신을 진주같은 보물로
만든다는 말이 생각난다. 사실 고통은 내 인생을 새로운 경지로 몰고
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결혼하지 않고 평생 주의 일꾼이 되리라고 결심하였고 
동료들에게 독신주의자라는 평도 받았다. 일찍이 부모님의 이상의 차이
 로 인해 순탄하지 못했던 가정생활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 같았다. 나
 는 꼭 주의 일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한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만주에서 온 소식
 
     1년 반만에 기쁜소식이 전해져 왔다. 북만주로 떠나셨던 아버지가
 적게나마 기반을 잡으시고 가족들을 다 하얼빈으로 오라고 하시는 내
 용이었다
     누구보다도 제일 반가운 사람은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성
 공을 위해 매일처럼 기도하셨는데 급기야 그 기도가 응답된 것이다.
어머니는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기뻐하셨다
    어머니는 "넓은 나라, 신앙을 지킬 수 있는 자유의 땅으로 가자!"고
하시면서 신앙의 자유가 주어진 데 대하여 기뻐하시며, 동생들을 데리
고 아버지가 계신 북만주로 가시게 되었다.
    나는 1년 더 있으면 졸업을 하게 되므로 졸업을 하고 나서 만주
로 가기로 작정하였다. 어머니는 여장을 꾸려 북만주로 떠나셨다. 이
미 아버지는 집을 장만해놓으셨다. 다소의 가산을 처분하여 북만주로
떠나셨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받던 핍박은 끝을 맺은 것이었다. 어머니는 신앙심이 깊
었기 때문에 어려운 고비도 넉넉히 넘기신 것이다. 만약 어머니가 쓰
러지셨다면 우리들의 형편은 달라졌으리라.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대륙을 찾아온 청교도들처럼 어머니는 신앙
의 자유를 찾아 북만주로 떠나셨다.
    어머니가 북만주로 떠나간 후에는 외로움이 더욱 깊이 엄습해 왔다.
사실 학교 기숙사에 있으니까 어머니가 고향집에 계시든 북만주 땅에
계시든 뵙지 못하는 것은 똑같았지만 마음속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사
뭇 달랐다.
    고향을 떠나 부모와 헤어져 대구에서 4년이란 세월을 보냈다. 어렸
던 나는 성숙한 아가씨로 변했다. 드디어 기다리던 졸업식이 다가왔다
참으로 감개무량한 일이었다. 그러나 부모님과 동생들이 북만주에 있
기 때문에 홀로 졸업을 위해 안감힘을 써야 했다. 물론 북만주로 가신
어머니는 학비를 충분히 보내 주셨다.
    그렇기 때문에 졸업반 때에는 고생을 하지 않았다. 땀 흘린 후 농부
에게는 가을의 수확이 온다. 인생의 결실도 수고 없이 맺을 수는 없는
것이다.
    여학교를 졸업하고 나니 삼촌께서 일본 유학을 권유하셨지만 거절
했다. 어머니 곁에 가서 가족과 함께 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부모님
고생을 덜어 드리기 위해서였다.
    나는 부모님이 계시는 북만주로 가기 위해 짐을 꾸렸다. 며칠 간 무
엇인가 생각에.잠겨 계시던 할아버지께서 동행을하시겠다는 뜻을 밝
히셨다. 그렇게도 핍박하던 할아버지께서 "나도 가보아야겠다. " 하시
며 손녀 뒤를 따라 나섰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할아버지가 왜 나를 따라 나서시는 것일까? 손녀 혼자 보내기 안
되어서 그럴까? 아니면 자부에게 너무했다고 후회하셔서 사랑의 뜻으
로 가시는 걸까?'
    이틀 밤낮을 기차에 몸을 싣고 머나먼 북만주 땅 하얼빈으로 달려
갔다. 할아버지는 별로 말씀도 안 하시고 차창 밖 풍경에서 눈을 떼지
않으셨다. 우리 나라에는 봄소식이 왔으나 북으로 올라 갈수록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았다.

하얼빈 역
 
    졸업을 하고 집을 향해 가는 기분이란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내 집, 가족들, 생각만 해도 몸이 가벼워 오는 느낌이었다 미지의
세계, 그리움의 대상이었던 북만주 하얼빈 땅을 밟는다는 것과 내 부
모,형제를 만난다는 생각에 가슴이 설레이기까지 했다. 이틀 동안 기
차로 계속 달려갔다. 레일 위로 바퀴가 굴러가는 느낌, 객차 사이의 연
결쇠가 약간 삐걱대며 끌리는 느낌, 기계소리를 들으면서 얼마를 가다
가 드디어 하얼빈 역에 도착하였다.
    북만주 땅은 아직 추위가 풀리지 않아서 사람들의 활동이 힘들어
보였다. 추위에 약한 나는 몸이 더욱 움츠러들었다 누더기를 걸친 마
부나 마차들은 아주 몸에 밴 양 추위에도 익숙해 보였다.
    나는 보고 싶었던 부모님,그리고 동생들의 환영 속에서 하얼빈 역
을 빠져 나왔다. 그 환희의 기쁨은 혼자 외롭게 살던 나에게는 숨가쁨
을 느끼게 했다. '여기가 안중근 의사가 일본인 이토 히로부미를 쏘아
쓰러뜨린 역사적인 곳인가? 어디일까?'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의분이
솟았다. 식구들과 함께 마차를 타고 황혼이 깔린 돌로 다듬어 만든 넓
은 거리를 지나 집에 도착하였다.
    아버지, 어머니는 이 곳에서 뿌리를 내리기 위해 얼마나 고생하셨
을까? 식구들의 모든 복장이 중국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제는 내가
부모님을 도와 한 몫을 해야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아담한 우리 집에 들어섰다. 영하 30도에서 40도를 오르내리는 지
방이라 규모가 클 수도 없었다. 이중 창문으로 된 유리창에는 김이 서
려있고 온 집안은 따뜻했고 아늑했다. 방은 4개였고 중앙에는 페치카
가 있어 석탄을 계속 때며 24시간 항상 따뜻하게 했다. 상봉의 기쁨으
로 그 동안의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새하얗게 밤을 새웠다. 마음을 털
어 놓고 말할 수 있는 온정과 기쁨이 객지에서 오랫동안 쓸쓸히 지내
온 나에게는 감격스러운 것이었다
    하룻밤을 지내고 나니 어머니를 빼고는 모두 남자들인 우리 식구들
을 바라보니 어머니가 얼마나 힘들게 사셨을까 마음 아프게 느껴졌다.
풍부한 살림은 아니었으나 한국에 있을 때에 비하면 모든 면에 있어서
넉넉하였다. 우선 식사만 해도 쌀밥을 먹을 수 있었고 가사에 사용되
는 소모품들도 옹색하지 않았다. 동생들의 교육문제도 여러 모로 고려
되어 있었다. 두 동생은 그 곳에서 가장 이름있는 중학교에 다니고 있
었기에 그것도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정성임을 알 수 있었다
    우리 집은 독채라지만 여러 세대가 모여살 수 있도록 칸막이로 되
어 있었다. 오늘의 콘도미니엄 같은 형태였는데 사람이 다니는 마당을
가운데 두고서로 마주보며 여러 채의 집이 있었다 전면에 큰 대문이
있고 사람이 다니는 중간 샛문이 있었다. 한국 사람이 4~5가정 살고
있었고 일본인도 두 가정 있었으며 나머지는 중국 사람들이었다. 이질
문화권 속에서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볼 때 민족을 초월한
사랑의 집단으로 아름답게 보였다. 도로변에 세워진 크고 웅장한 대문
은 옛날 마적단을 방비한 문이 아닐까 싶었다. 자기 집 앞을 깨끗이 쓸
며 공동으로 사용하는 마당을 두고 사이좋게 지내고 있었다.
   나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 속에서 뿌리를 내려가며 살리라고 몇번
이고 다짐하였다. 우리 집은 주님을 모시고 밤마다 가정 제단을 쌓고
말씀을 중심으로 순종하며 살려고 노력했다. 주님이 주신 선물인 믿음
과 평안은 그 누구도 앗아갈 수 없었다.
    나는 거리를 구경하러 나갔다. 고층건물이 우뚝 서 있는 게 보였다.
그 건물은 도키와 마루쇼라는 대표적인 일본인 백화점이었다. 거리는
아스팔트로 단장되어 대도시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군데군데 사람
들이 줄을 지어 있기에 무엇인가 궁금했는데 전시중이라 생필품이 부
족한 때라,여러 가지 배급을타기 위해서였다. 신사복을 입은 깨끗한
옷차림의 일본인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이 도시의 중심에는 일본인과 한국인이 살고 있었으며, 문화 시설
도 갖추어져 있었다. 중국인들은 변두리에서 만주족과 함께 집단을 이
루어 살고 있었다. 교통수단은 말을 많이 이용하기에 길이 깨끗하지는
않았다. 마차들이 많이 다니기 때문이었다. 길거리에는 손수레를 끌고
다니는 장사가 많아서 아무 곳에서나 서서 사먹고 버리니 지저분할 수
밖에 없었다. 건물도 낡아 보였다.
    백계 러시아 사람들은 기다아스카이어를 중심으로 하여 대부분이
남녀 양복점을 경영하는상인들이고 혁명 당시 소련에서 망명온 귀족
과 자본주의자들이었다. 그밖에도 몽골 족이 있었으며 일본인은 일등
국민을 자처하여 백화점만을 이용하였는데 그들의 자부심은 외부로도
나타나 보였으며 전승국가의 기세가 당당하였다. 어느 국민이나 안정
된 국가가 있어야 어느 곳에 가도 안전하게 살 수 있다는 점을 뼈저리
게 느낄 수 있었다.

    사회의 첫걸음       
 
     거리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여러 형태의 시민들의 표정을 열
심히 살폈다. 그 중의 일원이 되어 나 역시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생각
했다 외국생활의 첫 걸음은 중국사람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변두리
우체국에서 시작되었다. 관공서인 까닭에 모든 서류는 일본어와 중국
어로 처리되었다. 나는 일본어 공문을 담당했다. 한문을 이해할 수 있
었기 때문에 중국어 공문도 차츰 차츰 익힐 수 있었고 친구도 사귀어
별 불편없이 직장생활을 해낼 수 있었다. 덕분에 나는 하얼빈에서 뿌
리를 내리는 데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조선에 있을 때에는 신앙의 자유가 없었으므로 황국신민으로서 신
사 참배의 우상 숭배를 할 필요가 있었다 만주에 온 이후로는 누구의
간섭도 없이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폭풍과 같은 핍박이 사라
지고 그 연단의 과정을 이기고 구세주를 바라보는 차원 높은 신앙을
소유하게 되어 얼마나 기쁜일인지 ! 소나기가 퍼붓고 나면 햇빛이 눈부
시게 쏟아지듯 시험의 관문을 잘 통과해야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영
광이 있다는 산 경험이었다.
    주일 저녁이면 교회에서 중국어 성경 공부를 했다. 교회는 집과는
먼 거리에 떨어져 있었다.
   나는 남보다더 일찍 가서 일상생활에 필요한 중국어를 배웠다. 예
배가 끝나고 집에 혼자 돌아을 때는 위험한 까닭에 아버지가 늘 동행
해 주셨다. 오랫만에 아버지는 성숙해진 딸과 함께 신앙에 대한 토론
이나 가정에 대한 진로도 의논하면서 대견해 하셨다. 고향에서처럼 어
른들의 간섭이 없이 북만주 대륙에서 하나님을 마음껏 섬기니 또한 기
쁨이 충만했다. 부녀간의 대화는 날로 무게를 더해 갔고 국가와사상
에 대해서도 논의할 수 있어서 가슴은 마냥 부풀기만 했다. 안정되고
귀한 시간들이었다. 우리 가정에 또 하나의 경사가 생겼다. 어머니가
막내동생을 낳았다. 남자가 많은 집안이지만 남동생 재륭이를 낳았을
때도 온 식구는 기뻐했다. 식구가 늘어날수록 북만주에서의 뿌리는 더
깊게 내려지고 있었다.
    큰 동생은 대학입시 준비를 하게 되었고,둘째 동생은 일본인 고등
학교를 다녔고, 셋째 동생은 조선민족이 운영하는 유일한 금강초등학
교 학생이 되었다. 그 외 친척들도 만주로 이주해 오게 되었고 외할머
니도 모셔왔다.
    우리는 영육간의 큰 축복 중 하나님께 감사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학교 교사로
 
    그후 우체국을 그만두고 금강초등학교 교사로 전직하였다. 하얼빈
에 와서 내 민족 내 동포 어린이를 교육시키게 되자 조선민족으로 긍
지를 가지게 되었고 또한 보람을 느꼈다. 아버지나 어머니와 동생들까
지도 찬사와 격려를 해주었다. 그후 대동아전쟁 즉 미일전쟁이 일어났
다. 여학교 때처럼 전송 나가는 일은 없었지만 어쩐지 상황이 급박하
게 돌아가는 것 같았다. 병역 의무에 해당된 남자에겐 신고하라는 시
달이 왔다. 나의 큰 동생 황재열은 병역 해당자로 신고를 해야 했다.
당국에서는 간섭이 점점 심해졌다.
    병역 해당자는 그 대우가 일본인과 같았다. 쌀과 설탕, 기름 등을 주
면서 차별없이 대우하며 대학입시 자격도 갖추게 하니 부득이 입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조선인에게 주는 배급은 잡곡인 보리쌀, 좁쌀이 더 많았고
그 외의 배급도 일본인이 우선이었고 그 다음 조선사람에게 그 다음이
중국 본토인으로 차별 대우를 받았었다. 중국 사람은 거의 찌꺼기뿐이
니 그들의 불평은 대단히 컸다. 이러한 현상은 도시보다 지방이 더욱
심했고 조선족이나 만주족은 허리를 더 졸라매야 했다. 모든 물자는
통제품이었고 큰 백화점에서는 일본 사람 아니 일본말에 능통한 사람
만 살 수 있는 제도로 바뀌었다. 나는 일본의 종말이 가까웠구나 하고
  생각했다. 불안과 초조한 마음이 엄습해 왔다.
     아버지께서 먼저 고향으로 다니러 나가셨다. 우리 가정은 북만주에
 서 더 살 수 없음을 깨닫고 마음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계속 금강초등학교에 근무하고 있었다. 어린이들과 지내는 시간
 이 무척 즐겁고도 보람되었다. 하얼빈의 조선족은 비교적 자유로이 우
 리 말을 쓸 수 있었고 학과목은 주로 일본어 책을 사용했다.
     하루는 수업을 마친 오후에 전례대로 라디오 뉴스를 통해 전승결과
 를 듣고자 귀를 기울였다. 바로 그때 일본국이 항복하는 보도가 울려
 나왔다. 깜짝 놀란 직원들은 귀를 기울였다. 평소에 나와 친근하게 지
 내던 일본인 와다 선생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위로해 주기에
 앞서 해방의 기쁨으로 벅차 있었다.
    8.15 해방이 되었다. 나는 기쁘면서도 당황했다. 외국에 사는 사람
 들은 이 갑작스러운 변화에 당황하면서 앞날의 설계를 해야만 했다.
하얼빈 땅은 하루아침에 질서가 뒤흔들렸다. 중국 사람들이 떼를 지어
일본인 사업체나 건물에 들어가서 있는데로 빼앗는 것이었다. 길거리
에 잘못 나갔다가는 봉변을 당하기 일쑤였다. 심지어 매맞아 죽는 사
람도 있었을 정도였다. 물건을 빼앗긴 일본 사람은 목숨만 살려 달라
고 애원하며 정처없이 몸만 피신하는 경우가 수도 없이 많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당당하던 일본인들이 이제는 "목숨만 목숨
만‥‥‥ 하고 있었다. 성난 호랑이와 같은 중국 사람들은 조선족은 건드
리지 않았다.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중국 사람들과는 서로의 슬픔
을 하소연하면서 손을 마주 잡았다. 그들도 주권을 빼앗기고 우리도
나라를 빼앗긴 설움 때문이었다.
   며칠 후 거리에 수만 명의 소련군이 탱크를 몰고 입성하였다. 내가
놀란 것은 북만주에 와있던 백계 러시아인들의 반응 때문이었다. 그들
은 자기의 동족인데도 반가워하지 않고 오히려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
들은 또 어디로 피신을 가야 하느냐고 한탄을 하고 있었다. 참으로 딱
한 실정이었다.
    한편 우리 가정은 하얼빈에 뿌리 내린 지 7년 만에 다시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정든 하얼빈을 떠나야만 했다. 주던 배급도 이제는 그치
고 말았다. 다행히 금강초등학교에 봉직했던 관계로 학교에 남아있는
약간의 쌀을 탈 수 있었다. 우리들은 귀국준비를 서둘렀다.
    집안의 모든 가산을 남겨 놓고 식량과 입을 옷 몇 벌씩만 싸가지고
떠나기로 했다. 우선 교회로 가서 동포들의 동태를 파악해야 하기 때
문에 대담하게 나 혼자서 교회를 찾아갔다. 길거리에 나서니 소련군이
따발총을 거꾸로 메고 아무 것이나 강탈하며 젊은 여자를 찾고 있었
다. 살기가 등등한 거리를 지나 교회에 도착했을 때 모든 신자들이 어
떻게 왔느냐고 깜짝 놀라며 반가워했다.
    죽을 힘을 다해 찾아갔으나 교회에 있는 교인들도 제 살 길을 정하
지 못하고 있으니 의논할 수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기도를 드
린 후 교회문을 나왔다. 길을 한참 걷는데 소련군인이 총을 나의 가슴
에 들이대고 위헙을 가해왔다. 그때 내 뒤에서 오던 교회 청년이 무엇
이라 말하니 내게 총을 겨누고 있던 소련군 졸병은 달아나버렸다. 그
청년이 나를 우리 집에까지 데려다 주었다. 고마운 청년이었다. 나는
집에 들어와 안도의 숨을 쉬었으며 곧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그런데 우리 집 안에서 또 한 번의 비상사태가 일어났다. 젊은 일본
여자를 노린 소련군인이 기습을해온 것이다. 그 집 안에 있었던 사람
들은 숨을 죽이고 몇 시간 동안 공포에 질려 있었다. 나는 두 번의 고
비를 잘 넘겼다. 나는 생각했다. "가자! 내 조국으로!"

귀국열차
 
     "고국으로 돌아가자!" 이렇게 마음먹고 우리 가족은 떠날 준비를
하면서 외부로는 동포들과 접촉을 하고 있었다. 수소문하던 중 좋은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다. 마침 어떤 동포가 공산주의 선전을 위한 귀
국단체를 조직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귀국단체에서는 당국과 교섭을 펴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는 재빨리
돈을 만들어 단체에 가입하였다. 단체에 가입하고 2주일 후 모집 인원
300여 명은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귀국열차가 준비된 하얼빈역으
로 집결하였다. 사실 귀국열차는 모험적이었다. 무조건 떠나야겠다는
사람들의 소망이었을 뿐 우리 가족은 기도만 할 뿐이었다.
    우리는 나라 없는 설움을 받고 있었다. 이럴 때 내 나라가 있었다면
우리 정부가 우리들을 보호해 주지 않았겠는가? 나라 없는 백성으로
서 그것도 제 땅이 아닌 외국에서 설움을 당하고서야 민족과 조국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느꼈다.
    이 고난을 나의 힘으로 뚫고 나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소련 군인만
보면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처럼 모두 그저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겨우 고국으로 돌아가는 귀국열차에 몸을 실었다. 아버지는 먼저
떠나셨고 어머니를 위시한 전 가족 여섯 식구가 모두 같이 떠났다. 
기적소리를 울리며 기차는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나는 눈을 감고 감사의
 기도를 다시 하나님께 드렸다. 기차는 달려가지만 그야말로 완행열차
 였다. '이젠,달리는구나' 하고 보면 또 섰다. 이렇게 하여 무더운 태양
 과 싸워가면서 신경(지금은 장춘), 봉천(지금은 심양), 안동(지금은 단
 동)을 통과하여 나의 조국 신의주 땅에 도착하였다. 한 역에서 하루씩
 이나 머물 때도 있었다. 그러나 걸어서 갈 수도 없는 일이니 기다리며
 참았다.
     역에는 사서 먹을 음식도 없었다. 자기의 냄비를 가지고 역 플랫폼
 에서 밥을 지어 먹으면서 만주 땅에서 빠져나오게 되었다. 세수도 목
 욕도 못하고 긴 날들을 보냈으니 냄새가 날 뿐만 아니라 그 모습은 거
지와 다를 바가 없었다. 준비한 돈과 보석들이 없어져갔다. 기차가 정
지할 때마다 소련군인들이 기차 안에 들어와서 검문검색을 했다. 이
 로스키들은 주로 여자를 요구하는 무법천지의 졸병들이기 때문에 나
는 의자 밑에 숨어서 가는 때가 많았다.
    찌는 듯한 더위에 땀냄새와 싸워가면서 봉변을 면하고자 가쁜 숨을
쉬고 있었다. 신의주에 도착했을 때는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이제는
살았구나! 공산군인, 소련군인을 안 보니 살게 되었구나' 했지만 그 생
각도 잠시 뿐어었다.
    공산군과 소련군인은 신의주에서도 여전히 우리 일행을 괴롭혔다.
우리 일행은 신의주에서 평양으로 왔고 다시 황해도 해주에 이르게 되
었다. 초가을 하늘 위에는 잔잔한 구름이 깔려 있어 조국의 가을 정취
를 흠뻑 느낄 수 있었다
    기차는 해주에서 더 가지 못해 일행은 기차에서 내려서 걷지 않으
면 안 되었다. 안내자의 인도에 따라 남쪽을 향해 걸었다. 우리 식구들
은 남으로 남으로 계속 걸어가기만 했다. 몹시 지친 상태였다. 할 수
없이 달구지 하나를 빌려 일행 중 노약자들을 태우고 남쪽을 향해 가
야만 했다.
    나는 다리가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달구지에 간신히
끼워탔다. 달구지가 강을 건너가게 되었다. 제법 수심이 깊었다. 나는
밑에서 새어 들어온 물 때문에 전신이 젖고 말았다. 초가을의 밤공기
는 차가워서 겨울을 연상케 하였다. 내 몸은 꽁꽁 얼어붙어서 심장이
마비될 것 같았다. 더 이상 이대로 갈 수는 없었다
    우리 일행은 길거리에서 떨어진 외딴 집에서 몸을 녹이고 그 다음
날 다시 남쪽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어머니는 동생을 등에 업고
또 짐을 지고 안간힘을 다해 발걸음을 재촉하셨다. 가족들과 일행들에
게서 이탈되지 않기 위해서였다. 어머니는 참으로 강하고 담대했다
    하루 해를 지나 초저녁에 우리 일행은 임진강에 도착했다. 안내자
의 말이 오늘 밤 달이 지기 전에 이 강을 건너야 한다고 했다. 만약 건
너지 못하면 대낮에는 갈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낮에 가다가는 붙들
리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그곳을 살펴보았다. 그곳에 철로가 있었는데 그 철로 밑에는
강물이 흘러 가고 있었다. 조심성 있게 걸음을 떼어 놓아야지 실수를
하는 날에는 밑으로 떨어져서 물 속에 빠져 죽게 될지도 몰랐다.
    우리 일행은 한사람의 실수도 없었다 최악의 사태에서 승리한 것
이었다. 우리들은 서로서로 염려하면서 강변을 탈출했다. 다시 기차에
몸을 싣고 서울로 향하였다. 서울역에 도착한 일행은 안내원에 의하여
역 앞에 마련된 수용소에 들어갔다.
    그 수용소는 큰 건물이었는데 수백 명의 피난민을 수용하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단체에서 벗어나 다시 고향 땅으로 내려갔다. 기다리던
고향 예천읍이었다. 고향에 도착하니 동네사람, 친지들이 환영해 주었
다. 나는 고향이 있는 것이 무한히 기뻤다. 그러나그 기쁨도 며칠 가
지 않았다
    나는 생활전선을 향해 새로운 싸움을 시작해야만 했다. 다만 조국
의 해방이 있기에 기쁠 따름이었지 고생과 수고는 떠나지 않았다. 인
생길 가는 몸이 이처럼 험할 수 있으랴!그래도 고향은 내 고향이다.
    해방된 조국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었겠는가. 우선 예수를
자유로이 믿게 되었다. 그러나 고생은 그때부터였다. 나는 곰곰이 장
래 일을 설계해 나아갔다. 나중에 알아보니 북만주에서 고향까지 걸어
서 문전걸식을 하며 2개월 이상 걸려서 도착한 사람도 있었다고 했다.
우리가 탄 귀국열차는 그 이후에는 어디서도 볼 수 없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Today:
Total:
 
   NORTH KOREA NEWS  |  SOUTH KOREA NEWS  |  U.S. NEWS  |  NEWS IN ENGLISH  |  커뮤니티  |  L.A.생활  |  전문가 상담  |  Contact Us  |  About Us
Copy Right (c)  1999-2010  www.unitypress.com  Info@unitypress.com            web design by StouchDesig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