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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S. NEWS  
(신앙간증수기)이민 목회자의 아내-(2)임재순 지음 4/29/2010

                   < 머 리  말 >
 
 
회갑(1984년도)을 맞으면서 긴 인생길을 회고해 볼 때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행복했다기보다 숨가쁜 역경의 고비가 많았습니
 
다. 시대적인 변천에 따라 험준한 굴곡도 많았고 눈물 없이는 돌아볼
수 없는 인생 여정의 흔적이 마음을 흔들어 놓아 붓을 잡아 보았습니
다.
    경상도 산골에서 태어나 남달리 일찍이 복음에 눈을 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저는 신앙생활이 험난했고, 또 핍박도 많았습니다. 태산같
이 밀어닥친 신앙의 여정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그때마다 밝은 등불
이 되어 주셨고 저로 하여금 전도자의 길을 밟게 해주셨습니다. 이것
이 하니님의 섭리임을믿고 목회자의 아내로서 신앙의 토막토막을  회
상해 보게 되었습니다.
    인생 행로 중 병으로 사경을 헤매며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 귀중한
보화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두를 하나님께 감사하며 오고 가는
우리의 인생길에 보다 소중한 길잡이가 되어진다면 큰 기쁨과 보람으
로 생각하는 바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가지가지 받은 은혜가 크건마는 글 쓰는 재주
도 없고 몸도 불편하여 제대로 표현을 하지 못한 것을 유감스럽게 생
각합니다. 그저 생각나는 대로 한 토막씩 기록하였으므로 미진한 것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간절한 저의 중심만 전달된다면 큰 기쁨으로
생각하겠습니 다.
 
평소 저를 위해 희생하신 어머님께 불효를 씻을 길이 없으나 어머님
을 향한 이 딸의 사랑을 이 글로 사죄 드리고자 합니다.
    인생 행로에 있어서 교역자의 아내의 길이란 참으로 눈물 없이 못
가는 길, 희생 없이는 못가는 길입니다. 때로는 쓰러지고 후회할 때도
있는 길입니다.
    동역자의 아내들이여!
    같은 길을 걸어온 동역자의 수기가 여러분의 사역에 도움이 된다면
중심을 펼쳐 놓은 보람을 찾았다고 봅니다.
 
    끝으로 이 책이 나오기까지 앞에서 이끌어 주신 배기섭 목사님과
원고 정리에 수고하신 김문희 집사님, 뒤에서 밀어주신 김충남 목사님
께 감사를 드립니다.
    허술한 인생을 살아온 허물투성인데 이 간증집을 내 일생의 전부라
고 보아 함께 정성을 기울여 주신 데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
다.
    이 간증잡은.1985년에 출판된 것을 개정하여 다시 낸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수고해 주신 쿰란출판사 이형규 장로님에도 감사를 드립니
다.
 
                                                   1999년 11월 1일
                                                 로스앤젤레스에서
                                                          임 재 순

 


차례
 
추천사 · 배기섭 목사 /2
머리말 /4
 
 제1부 해방이 되기까지

전송 / 10
내 고향 예천 / 12
여학생 / 15
첫번째 방학 / 17
삯바느질 / 19
우편물 /23
만주에서 온 소식 /27
하얼빈 역 /30
사회의 첫걸음 /33                                                  2부 한국을 떠나다
학교 교사로 / 31                                                   병으로 쓰러지고 /44
귀극열차 / 38                                                      소생의 그날 /46
                                                                   고학생에게 /48
                                                                  결혼 /52
                                                                  신학생 시절 /55
                                                                  여주 개척교회 /58
                                                                  한국전잼 /61
                                                                  피난 길을 떠나다 /65
                                                                  1 ·4후퇴 /68
                                                                  하나님, 제 아들을 /71
                                                                  온천동교회로 / 71
                                                                  공군 군목으로 입대 / 81
                                                                  사천비행장으로 /84
                                                                  서울로 전속 / 88
                                                                  미국으로 떠나 보내며 /91


 3부 미국생활
 상봉 /96
 "발 뒤꿈치를 들고 다녀요!" /99
 봉제공장 / 101
 유학싱 뒷바라지 / 104
노력하는 식구들 / 107
중노동의 날 / 110
기술자가 된 나 / 113
땀은 흘려도 / 111
교회 건물 구입 / 118
땀 흘리는 여성도들 / 121
나의 어머니 /124
나의 꿈나무 / 128
교역자의 아내 / 131
 
                                   제4부 투병기
                                   발병 / 136
                                   병과 나 / 141
                                   바보 / 147
                                  시련은 또 다시 / 154
                                  대화 / 158
                                  흐르는 피 / 162
                                  중국에서 가지고 온 약 / 164
                                  그리스도의 사랑 / 166
                                  나의 소원 / 168
                                  사남매 /173
                                  고향에 가다 / 180


제5부 어행기
남미선교여행 / 190
     ■ 브라질리아 /200
     ■ 리우데자네이루 /202
땀을 닦아주며 '안식년'을 /205
동남아선교여행 /208
  1. 1차 여행 /208
      ■ 호주 /208
      ■ 뉴질랜드 /210
      ■ 필리핀 /212
      ■ 인도네시아 /214
      1 방글라데시 /216
      ■ 인도/218
      ■ 태국'/221
      ■ 홍콩 /224
      ■ 대만/226
  2. 2차 여행 /228
      * 중국 /228
      * 일본/234
성지 순례자가 되어 /238
      ■ 요르단/이스라엘/이집트 /238/411 / 245

 

제 1 부 해방이 되기까지


 전송
 
    일제 말엽 전시의 학교생활은 온통 전쟁과 연결되어 엉망이었다.
    수업이 시작되자마자 역에 나가 병정들을 전송(오미오꾸리)하라는
전달이 왔다. 이때는 항상 1학년생이 나가야 했다.
     "일학년생 전원 운동장으로 집합!" 학교 비상 종소리와 함께 교무
실 지도 선생님의 명령이 떨어졌다. 우리는 교실에서 일제히 운동장
으로 나갔다. 열을 지어 손에 일장기를 들고 2마일이 넘는 대구역까지
걸어가야 한다. 역에 도착하면 일장기를 흔들면서 목청 높여 '갓대구
루소도(일본 군가)' 를 불러야만 했다. 긴 열차 칸칸마다 군복을 입은
청년들이 파리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다 지친 모양이었다. 우리의 환
송이 그리 반가울 수 없었던 그들은 긴장한 모습과 웃음을 잃은 무표
정한 얼굴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드디어 기차가 기적소리를 내
며 연기를 뿜기 시작했다. 군인들을 가득 실은 이 기차는 북으로 북으
로 서울, 평 양, 신의주를 거쳐 만주로 가서 다시 중국대륙으로 가는 것
이다.
    기차가 몇 날 며칠을 달리는 동안 쉬어가는 역마다 이처럼 아무것
도 모르는 어린 학생들을 동원하여 승전을 기원하는 전송을 강요했다.
동원되는 군인의 수가 늘어감에 따라 학생들의 피곤함은 날로 더해갔다.

 기차에 타고 있는 군인들은 일본 사랐들만이 아니어서 한국 청년들
도 학도병이라는 이름으로 강제 징집되어 끌려갔다. 부모와 처자를 두
고 죽음의 전장을 향하여 떠나가는 처량한 모습들이었다. 일본제국은
증일전쟁을 일으키고 아시아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당시 조선에 강력
한 전시 시책을 펴나가며 탄압을 가하고 있었다. 전송(오미오꾸리)은
일본제국 당국의 당당한명령이라 생명이 붙어 있는 한 복종해야 했고
전국에 산재해 있는 기독교 계통의 미션스쿨에서도 강행되고 있는 형
편이었다.
    뿐만 아니라 동방요배, 국민의례 등 감시가 심했다. 아무리 귀중한
시간이라도 방공연습 사이렌이 울리면 어두컴컴한 방공호 속에서 숨
을 죽여야만 했다. 일본제국은 패망 막바지에 이르자 점점 기승을 부
리더니 한국인에게 창씨개명이라는 명령을 내리고 성씨마저 빼앗아
버렸다. 성도 이름도 일본식의 이름이고 일상생활의 방식도 모두 일본
식으로만 통했다. 심지어 한글도 폐지시켰으며, 사용하면 징벌을 당하
였다. 일본말이 국어가 된 시대가 되었으니 실로 서글픈 세월의 연속
이었다. 나이 어린 여학생들은 전송을 끝마치고 귀교하면 기진하여 쓰
러질 정도였다. 기숙사로 돌아와서 때늦은 점심을 먹는데 잡곡밥 한
덩이와 부식이라고는 김치 또는 시래기 국이 전부였다. 그 밥을 먹고
수저를 놓으면 다시 배가 고팠다. 허기진 학생들이 누룽지라도 얻어
먹으려고 식당 아줌마에게 갖은 아양을 다 떠는 모습은 측은하기까지
했다. 부잣집 딸들은 집에서 가져온 간식을 먹을수 있었지만 나에게
는 그것도 해당되지 않았다. 그래서 긴긴 겨울밤을 허기지고 배고프게
보냈다.

 

내 고힝 예천
 
    태백산 줄기의 등을 타고 내려온 소백산이 가로 놓인 깊숙한 분지
에 자리잡은 소도시 경상북도 예천이라는 곳에서 나는 태어났다. 그곳
은 완고한 분위기의 지방으로 소문이 나서 여자들은 보통학교에도 잘
보내지 않아 한 학년에 여자가 모자란 탓으로 남자들과 합반 해야 하
는 형편이었다. 여자는 보통학교를 마치면 가정에서 가사를 돕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여학교에 진학한다는 것은 지방 유지나 부잣집 자녀
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 같은 것이었다.
    나의 아버님은 반농반상의 주민들을 상대로 포목점을 경영했다. 중국사
람과 교역하며 피륙을 파는 비단장사로서 집안 형편은 비교적 넉넉했
다. 그러나 가끔.부도도 났고 빨간 딱지도 붙어 부모님이 당황해하던
모습도 기억난다.
    나의 여학교 진학은 그 지방에서 크나큰 화제였다. 큰집, 작은집 할
것 없이 사촌들도 부모를 조르는 형편이었다. 완고한 친척들은 돈도
돈이지만 여자를 공부시키면 품행이 나빠져서 시집도 못가고 건방이
들어서 집안 망신할 것이라는 이유로 완강하게 반대 의사를 보였다.
심지어 동네에서는 부자도 아닌 주제에 상급학교에 보낸다고 빈정거
리는 뒷소리가 파다했다.

    부러워하는 친척이 있는가 하면 질시의 눈길을 보내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온 집안의 화젯거리가 되었다. 예수를 믿으니 아니 천주학
(당시는 천주교를 천주학이라고 불렀으며, 이 말은 큰 욕이었다. )을
하니 망신살이 뻗쳤다며 호통을 치는 어른들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
의 도우심으로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당시 예천읍장로교회의
김한기 장로님과 어머니께서 비밀리에 추진해 주신 결과였다. 어머니
는 교회에 다니심으로 개화사상에 일찍 눈을 뜨신 분이었다. 여자도
배워야 한다는 것과 지식을 터득함으로써 진보된 생활을 할 수 있음을
깨달은 분이었다. 무식했던 어머니도 교회 야학당에서 한글을 배우고
성경을 통독하게 되었다. 이토록 배움의 중요성을 인식하신 어머니는
믿음이 좋으신 장로님과 의논하여 나를 배움의 길로 인도하신 강한 어
머니였다. 참으로감사를 드린다. 어머니는 용기 있는 믿음의 여성이
었고 사랑이 넘치는 분이었다.
    본래 우리 집안은 옛부터 불교가정으로 미신과 무당굿 등에 열심이
었다. 그때 우리 집안에 우환이 생겼다. 갓난아기가 병명도 없이 시름
시름 앓으며 죽어가고 있었다. 애가 탄 어머니는 온갖 방법을 다 동원
하기에 이르렀다. 아침저녁으로 물을 떠놓고 불공을 드리는가 하면 미
신을 섬기며 빌고 또 빌었다. 어머니는 뒤늦게 미신이 헛된 것임을 깨
닫고 하나님을 찾게 되었다. 그때부터 죽어가던 아이의 상태가 차차
회복되었고 어머니는 마음에 약속한 대로 아이를 등에 업고 교회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복음만이 올바른 길임을 믿고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
으니 우환이 도리어 복이 된 것이다. 어머니의 변화를 본 집안에서는
본격적인 반대가 시작되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조상의 제사도 모시지
않는 불측스러운 예수를 믿는다고 구박이 대단했다.
 그 노여움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핍박이었다. 어머니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결심을 굽히지 않았다. 참 길이요,진리요, 생명
인 예수를 믿었기에 무서운 핍박을 참고 견디어 낼 수 있었다 실로 완
고하기로 유명한 경상도 지방에 새로운 혁명을 일으킨 장갑성 여장부
라 하겠다. 이러한 어머니 덕분에 진학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신앙적인 용단은 내게 있어서 일생을 통해 최대의 선물이
되었다. 드디어 나는 여학교 학생이 된 것이다. 남들은 엄두도 못내는
일이었지만 위대한 혁명은 자식을 위한 진정한 사랑이었고 한 여성을
훌륭히 키워 내려는 크나큰 포부였음을 알 수 있었다. 김한기 장로님
께서는 이러한 어머니의 뜻에 감화되어 나의 인도자가 되셨다. 딸을
진학시킨 어머니는 많은 핍박 속에서도 기도로 굳건히 이겨 나가셧다
    나는 예천읍에서 화제의 주인공이 되었고드디어 대구에 있는신명
여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신명여학교는 미국북장로교 선교부에서
설립하고 지원하는 학교로서 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다하
는 학교였기에 내게는 적합한 학교였다. 어머니의 기도로 이루어진 나
의 입학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도전이었고 꿈과 이상을펼칠 수 있는
계기였다.


여학생
 
    대구는 분지로서 겨울이 춥고 길었다. 아직 남은 꽃샘 추위와 함께
봄의 정취가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것을 보며 설레는 마음을 안고 대구
로 올라왔다. 시골뜨기인 나는 새로운 환곁에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예천과는 달리 대구는 넓은 도시였으며 건물도 우뚝우뚝 높았고 사
람들도 바쁘게 왕래했다. 일단 기숙사에 입사한 후 단체생활이 시작되
었다. 모든 것이 낯설고 생소했지만 남들도 하는 일인데 나도 해보자
는 결심으로 열심히 익혔다.
    치마 저고리에 길게 머리를 땋은 시골 처녀 차림부터 변화를 시도
했다. 먼저 간단하게 머리를 잘라 단발머리로 바꾸었다. 치마저고리를
벗고 지정된 학교의 교복인 세일러복으로 바꾸어 입었다. 나는 완전
히 도시의 여학생으로 변신되었다. 등 뒤에는 신명여학교를 표시한
SM이라는 영어 글자, 양쪽에 달린 칼라에 치마에 주름까지 세워 입고
구두까지 신게 되니 큰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이러한 변화에
행복해 하면서 마음 깊은 곳에서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뜨겁게 울고
있었다. 환경의 변화에 따라 점점 철이 들고 성숙해 갔다. 부모를 그
리워하기보다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어머니께 보답해야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시골티를 벗었고 시야도 넓어졌으며 사고빙식
이나 행동도 달라지게 되었다. 여성으로서 좁은 안목이 점점 트여지는
것을 느꼈다.
    공부를 시키면 거만해지고 집안 망신이 된다던 어른들의 말씀이 무
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나의 의지가 깨우쳐짐에 따라 높은 세계를 지
향하여 폭넓게 사는 정신을 배웠기에 그들에게 모범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어린 소녀로서 혼자 기숙사에서 단체생활을 하면서 눈물로 기도하
며 '장차 나는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인가?' 하는 깊은생각에 잠
기기도 했다. 하나님께 이 엄청난 사실에 감사하며 인도해 주실 것을
기도하였다. '이 시간에도 나의 어머니는 딸을 멀리 보내고 간곡한 기
도를 드리시겠지? 얼마나 나의 책임이 크고 막중한가' 생각하면 그저
가슴이 벅차 올랐었다.
    어느덧 한 학기가 지나 여름방학이 되었다. 기숙사생들은 짐을 꾸
려 고향으로 돌아갔다. 4개월 동안을 지루한 줄 모르고 공부에 쫓기다
가 홀가분한 마음으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막상 기차에 오르니
부모 형제가 있는 집이 몹시 그리워졌다. '나의 변모를 보고 나의 어머
니의 반응은 어떨까? 친척들의 핍박에도 굳건히 견디시던 어머님을
위로 해야지, 어린 동생들도 더 사랑해 주어야지.' 마냥 마음이 부풀어
기차여행이 지루한 줄 몰랐다. 석앙 해가 질 무련 서쪽하늘에 깔려 있
는 노을을 바라보면서 집에 도착했다.


첫번째 방학
 
    가까운 친척은 물론이고 먼 친척 사이에서도 일대 소동이 일었다.
첫째, 가장 어른이신 할아버지께서 아침저녁으로 집안에 들어서시면
서 호통을 치시는 그 시달림은 정말 괴로운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맨
처음 나를 보시더니 기절초풍하셨다.
    "저 왜년! 일본으로 당장 썩 꺼져라. 저런 왜년은 집안에 둘 수 없
다.
    그렇게도 나를 귀여워 해주시던 할아버지셨는데 개화된 내 모습에
분노가 치솟았던 모양이셨다. 쇄국정책으로 일관했던 우리 나라가
어쩔 수 없이 개항을 하고 개화의 바람이 일자 특히 완고한 집안에서는
저항이 대단했다.
    나는 그러한 할아버지가 무서워 슬슬 피해 다니기만 했고 즐거운
방학을 우울하고 짜증스럽게 보냈다. 방학 동안 할아버지께 인사한번
드리지 못한 것이 끝내 마음에 걸렸다. 내가 제일 마음 아팠던 것은
어머니께로 그 화살이 갔기 때문이었다. '아이를 왜년을 만든 책임'이
어머니가 예수를 믿기 때문이라고 꾸중을 하셨다. 예수를 믿는 핍박이
가일층 불붙는 듯 했다.
    할아버지는 교회에 가지 못하도록 성경,찬송을 빼앗아 찢어서 
아궁이 속에 집어 던져 버렸다. 우리는 눈물로 기도드렸다. 발에 불덩어
리가 떨어지는 듯한 상황 아래서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주님뿐이
었다. 주일이 되면 할아버지는 대문을 지키고 서 계셨다. 교회에 가지
못하도록 감시하시며 "저 천주쟁이가 우리 황씨 문중을 망치는구나.
우리 문중의 체모를 예수쟁이가 망친다. "라고 하시며 걱정이 대단하셨
다. 사실 나의 어머니는 열여섯 살에 시집와서 예절이나 시부모님 공
경에 칭찬과 사랑을 독차지하며 양갓집 며느리로 소문이 나 있었다.
교회에 나가면서부터 가정의 질서는 흐트러졌고 조상의 제사도 모시
지 않으니 그 지탄은 이루말할 수 없었다. 불교 가정이었던 황씨 문중
에서 불공 역시 드리지 않았고 그렇게 열심이었던 어머니의 변화에 이
제는 온 집안이 부정탄다고 더욱 질색이었다. 모진 풍파는 슬며시 다
가오기도 했고 파도를 타고 아우성 치면서 몰려 오기도 했다. 나는 시
험을 당할 때 피할 길을 주신다고 한 성경의 말씀을 믿었다. 믿음이 없
이는 단 한 시간도 살 수도 호흡할 수도 없는 절망 상태였다. 한편 아
버지는 양쪽사이에서 견디지 못하시고 하시던 사업을 큰아버지께 맡
기고 멀리 북만주 땅으로 떠나시고 말았다.

 

삯바느질
 
    할아버지의 노여움은 풀리지 않았다. 한편 어머니는 고통속에서도
믿음의 씨앗을 키워 가셨다.
    어머니는 교회생활을 통해서 새로운 세계를 보기 시작했다. 성경을
읽기 위하여 한글을 배웠고 자녀들에게도 성경읽기를 권하셨다. 우리
가정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조용한 혁명이 일어나고 있었다. 아침과 저
녁에는 가정예배를 드렸으며 주일이 되면 자녀들에게까지 목욕을 하
게 했다. 자녀들이 성경을 외우지 않으면 밥도 못먹게 하는 완고한 기
독교인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어머니는 성경 말씀대로 살려고 안간힘을 썼으며 자신이 다녀보지
못한 학교에 자녀들을 꼭 보내서 자신이 못다한 일들을 그들이 해주
기 원하셨으며 주위의 극심한 반대에도 개의치 않고 굳은 의지와 투
지력으로 밀고 나가셨다. 어머니의 이러한 굳은 의욕으로 나는 공부
를 계속할 수 있었다.
    나는 1924년 7월 30일 경상북도 예천읍의 번창한 항씨문중에서 태
어났다. 대소가 친척들이 넓게 한 동리를 이루고 살면서 대대로 농사
와 장사로 지방 경제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부친 황학섭 씨의 장녀인 동시에 4남 1녀 중 고명딸이었다.
    피륙장사를 하셨던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으며 시골에서 보기
드문 고운 옷차림으로 행복하게 자라났다. 그러나 우리 가정에는 일시
에 풍파가 일어났다.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북만주로 떠나셔서 홀로 계
신 어머니를 날마다 꾸중을 하셨다. 그러나 어머니는 얼굴색 하나 변
하지 않았다. 보다 값진 복음이 그의 중심을 차지한 까닭이었다. 생각
이 깊은 친척들은 어머니를 우러러보고 격려와 동정을 보내기도 했다.
치마를 두른 여장부라고 뜻을 모아 주기도 했다.
    핍박이 닥쳐오고 시련이 올수록 어머니의 마음속에는 무섭게 용솟
음치는 굳은 의지가 있었다. 이것은 믿음이었다. 어머니에게 믿음이
없었다면 어찌 이 어려움을 승리로 이끌수가 있겠는가?
    할아버지는 큰 아버지와 합세하여 어머니의 뜻을 돌이키려고 온갖
공격을 퍼부었다. 그리고 경제면에서 파탄에 이르게 하였다. 어머니는
외로웠다. 남편이 머나먼 북만주 땅으로 떠나버려 생활면에서도 어려
움이 닥칠 때 하나님만을 믿고 위로받을 뿐이었다.
    "자비의 하나님!우리 가정에 평화가 회복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무서운 시련을 이길 수 있게 도와 주소서 !"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하나님과 주님만을 붙들고 나아갔다. 어
머니는 이 현실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아녀자의 몸으로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는 일거리를 찾았다. 그것은 삯바느질이었다.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굳건히 현실을 헤쳐 나아가는 본을 보여 주셨
다. 대구에 가서 공부하고 있는 나에게도 학비가 왔다.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를 하였다. 내가 어머님의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길은 열심
히 공부하는 것이었다. 기숙사에서 다른 학생들은 잠을 잘 때에도 나
는 눈을 비비며 한자라도 더 익히기 위해 피맺힌 노력을 했다. 이때 나
는 마음속에 평화의 천사가 찾아온 것처럼 포근함을 만끽했다. 나는
 어머니를 위해 기도했다.
      '사랑의 하나님! 어머니가 용기를 잃지 않고 굳세게 살게 하옵소
 서 !"
     겨울방학이 되어 짐을 싸가지고 집으로 왔다. 집안은 옛날과는 달
 랐다. 있어야 했던 물건들이 하나둘 없어진 것이다. 장롱도 없었고 금
 반지, 은수저 등도 보이지 않았다. 애지중지하며 아끼던 물건들이 다
 없어지고 말았으니 어머니는 얼마나 그 심정이 괴로울까 싶었다. 그러
 나 어머니는 자신의 의지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더 좋은 가보가 있더라
 도 처분하였을 것이다. 믿음을 가진 어머니는 굳은 의지로 자신의 환
 경을 정돈해 나아가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조용히 물었다.
     "어머니 ! 학교를 그만 두었으면 좋겠어요. 저는 별로 잘난 점도 없
 고 어머니가 기대하는 만큼 훌륭한 인재도 못돼요."
    어머니는 가구가 없어지고 생활에 곤경을 겪는 것을 알아차리고 하
 는 내말의 의미를 아셨다. 어머니는 나의 손을잡으며 이렇게 말을 이
으셨다.
     "보잘것없는 돌멩이 하나도 하나님이 쓰시고 싶으실 때 쓰게 만들
어야지. 네가 그만한 일에 견디지 못하면 어찌 이보다 더 큰 일을 하겠
느냐."
    손에는 힘이 전해졌고 가슴이 뜨거워지기 시작하였다.
    어머니의 심정을 이렇게도 몰랐구나 싶었다. 나는 용기를 내어 대
구로 올라가 더욱 분발했다.
    나도 이제는 일자리를 구해서 일을 하기로 결심하고 최소한 학비
라도 벌어 쓰기 위해 교장 선생님을 찾아갔다. 그리고 나에게 조그
마한 일자리라도 주십사고 말씀드렸다. 교장 선생님은 쾌히 승낙을 
하셨다. 내게 주어진 일은 학교 강당청소였다. 나는 학비면제를 받고 한
학기에 3원씩 받게 되었다 기쁜 마음으로 일하면서 공부하게 됨을 하
나님께 감사드렸다.
    어머니의 고생도 조금은 덜어드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어머니를 고생시키면서 공부를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언제나 내 머리
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머니께 편지를 보낼 때마다 나는 눈물로 글을
쓰게 되었다. 나를 공부시키는 것이 어머니의 의지요,자랑이 될지는
모르나 나로서는 마음이 무척이나 무거웠다. 이렇게 한 학기가 또 흘
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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