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비밀
  
 
   자유 게시판  
4.3 "사건"의 수수께끼와 진실 (한광덕 예비역 소장) 10/31/2003

Subject  
   4.3 "사건"의 수수께끼 (한광덕)


잠시만 참고 끝까지 눈을 빌려주세요
그리고 여러분의 판단을 부탁드립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상부상조하는 가운데    
노인을 공경하며 평화롭게 사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예절의 표상이었습니다
이 미덕이 무너지면서 혼란이 왔습니다
오늘날의 혼란은 언제부터 시작됐을까요

저는,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선전 선동하고  
자기보다 나은 사람들을 적으로 몰아가며
재산은 물론 생명까지도 인민재판 하는  
공산주의 방식이 처음 이 땅에 들어오면서
비롯되기 시작했다고 감히 주장합니다

8.15 해방정국의 당시 상황에서 신분차이로
"없는" 자가 "있는" 자의 목숨을 끊은 사건이
48년 4월 3일 02:00시의 4.3 "폭동"이었으며
미군정하의 경찰과 5.10선거의 관리요원들과  
그 가족들이 인민유격대의 공격목표였습니다

경찰력의 약화로 국방경비대가 동원되고
낮과 밤사이에 작전의 주도권이 바뀌는  
게리라전 양상  하에서 무고한 주민들까지
무참한 희생을 당하는 비극이 있었습니다

만약 제주도가 인민유격대에 완전 장악됐다면
오끼나와에서 처럼 상륙작전이 감행됐던가
그렇지 못했다면 그로부터 2년 후 6.25 남침시
대한민국은 없었다는 것이 저의 판단입니다
정부가 부산까지 밀렸을 때 국군의 신병훈련은
제주도의 제1훈련소에서만 이루어 졌으니까요  

폭동의 진행중인 48년 8월 25일, 인민유격대장이며
제주도의 남로당 총책이었던 김달삼은 북한에 가서
"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 폭동결과를 보고하면서    
"스탈린 만세"를 불렀으며 북한의 고급훈장을 받고  
김달삼부대를 이끌고 남하하여 유격전을 벌이다가  
50년 3월 정선지역 전투에서 사살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김일성-스탈린-모택동의 기밀문서를 기초로
최근 발행된 "한국전쟁의 진실과 수수께끼" 책자에는  
평양의 쏘련 대사가 모스크바로 보내는 전보(50.4.10)에  
"남한의 신문 라디오는 김달삼의 사망을 보도했으나
그는 현재 빨치산 활동을 위해 북한을 방문중이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 우리를 다시금 놀라게 합니다

4.3폭동 이전에 남쪽의 사회를 대 혼란으로 내 몰았던
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폭동에도 스티코프의 개입이
있었음이 그의 비망록에 적혀있음을 상기시켜드립니다
            (http://nk.joins.com-북한-이동현 자료실)

오늘 우리가 함께 확인하고 오래 기억해야만 할 것은  
4.3의 원흉이 무고한 제주도 희생자들의 아픔은 뒤로하고    
북한의 "애국열사능"에서 "남조선 혁명가"의 비문을 받고    
잠을 잔다는 사실이며 제주도지사가 감귤 보내기로
평양 갔을 때 현지에서 목격했습니다 (제주일보, 00.6.8)

반 백년전의 9월 총파업, 10월 폭동, 그리고 4.3무장폭동 등
해방정국의 혼란을 연상케 하는 오늘의 불안 속에서
삼천리 금수강산 무궁화동산을 지켜왔던 선조들의 지혜가
우리들 속에 살아나기를 기도하며 어떠한 상황 하에서도  
온 국민이 법규와 질서를 지켜서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 같은
외부의 불순세력이 우리들 틈에서 불장난을 하지 못하도록
온 국민이 경계의 눈을 크게 뜰 것을 바라는 바입니다


에디터 출판사가 발행한 "한국전쟁의 진실과 수수께끼"
(A.V.토르크노프 지음  구종서 옮김, 03.6.20)의 일독과
http://nk.joins.com-북한-이동현 자료실의 방문을 권합니다

2003.7.30. 11:00
한광덕  
4.3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위원회 위원    
----------------



Name    
   한광덕  


Subject  
   현역의 군과 경찰에게- 대한민국의 역사가 바뀔 수는 없다


  대한민국의 역사가 바뀔 수는 없다
                -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의 최종 심의를 앞두고-

지난 3월 29일, 4.3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위원회(4.3중앙위원회)의 심의에 부쳐졌던 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는 경찰 측 위촉위원인 이황우 위원과 필자(국방부 측 위촉위원)의 강력한 이의제기로 '앞으로 6개월 내에(2003,9,28일까지) 수정안이 제시되면 재심 후  수용한다'는 조건부로 채택되어 발표된 바 있다. 그러나 발표된 진상조사보고서에 대한 국민들의 무관심으로 인해 제안되는 수정안이 공평하고 신중하게 재검토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이 크게 우려된다. 왜곡된 진상조사보고서가 국가의 장래와 희생자의 입장을 균형 있게 고려하여 대폭 수정되지 않는다면 이는 곧 대한민국 역사를 바꾸는 중대한 계기가 될 것이기에 국민들에게 최종적인 관심의 촉구를 위해
이 글을 쓴다.
  
         4.3'사건'과 4.3위원회에 관련된 몇 가지 사실요약

1.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지난 반 100년 간 제주 4.3'사건'에 대한 역사인식은 다음과 같았다. 즉 이 사건은 48년 4월 3일에 발생한 무장 '폭동' 혹은 '반란'으로서 남로당(중앙당)이 48년의 제헌국회의원선거(5.10선거)를 저지하기 위하여 일으킨 반정부 투쟁이었으며 배후에  북한과 소련이 있었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다수의 양민이 희생된 사건으로 이해되어 왔다.

2. 그런데 김대중 정권 당시 1999년 12.16일에 제정된 특별법에서는 '폭동' 혹은 '반란'이란 명칭이 가치 중립적인 '사건'으로 바뀌고 4.3'사건'의 정의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에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 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규정됨으로서 국가공권력과 폭동 또는 반란 세력이 동일시되는 결과가 초래됐다.

3. 이 결과 당시 미군정의 실정과 공무원들의 부정 및 서북청년단을 비롯한 우익들의 과잉대응이 제주도민의 격렬한 저항을 유발했다는 측면이 부각되면서 '48년 4월3일 02:00시 제주도 전역에 걸쳐서 5.10선거를 반대하며 감행되었던 조직적인 남로당 인민유격대의 습격과 파괴행위에 대한 진압과 소탕작전이라는 사건의 본질은 희석되었다.

4. 4.3위원회의 국방부 위촉위원이었던 김점곤 위원은 진상조사보고서에 대한 특별소위원회에서의 심의과정에서 본 보고서가 인민공화국 수립 지지와 대한민국 수립 반대를 위한 남로당의 무력투쟁에 대한 군의 진압과 소탕작전이었다는 4.3'사건'의 본질과 진상은 덮어둔 채 희생자의 명예회복에만 중점을 두고 있음을 지적하고 일대 수정의 필요성을 역설 후 항의의 표시로 사퇴하였으며 이후 속개된 4.3중앙위원회에서 문제의 진상조사 보고서는 '6개월 내에(2003,9,28일까지) 수정안을 제시하면 검토 후 수용한다'는 조건부로 채택되었던 것이다.

5. 4.3사건 당시 통위부와 육군본부 정보국의 전투정보과장겸 첩보과장으로서 4.3사건의 실체를 소상히 파악했던 김점곤 위원은 4.3'사건'의 '피해자'가 모두 희생자로 단정될 때 조국에 대한 반역행위가 정당화될 위험성을 지적했으며 같은 논리로 '정당한 작전'이라는 명분만으로 무고한 주민의 피해마저 정당화시킬 수 없음을 평소의 소신으로 강조해 왔다.
이황우 위원과 필자도 제주도 전역을 거의 장악, 조직화한 인민유격대에 대한 군과 경찰의 소탕전은 국가의 정당한 주권수호행위였으며 이에 따라 출동한 군의 작전 또한 정당한 것으로 인민유격대의 도전과 이를 진압하려는 군과의 관계는 단순한 '충돌'이 아닌 전장에서의 군사적 적대관계로 파악되어야 함으로 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서 이 교전관계가 부정되면 군과 경찰의 존재의미는 부정될 수밖에 없음을 강조해 왔다. 국가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하는 책임이 있음으로 무고한 희생자에 대해서는 무한책임이 있지만 그 배경과 과정에 대한 명확한 진상규명이 있어야만 군·경의 명예도 보호되고 차후 유사사건의 방지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6. 4.3위원회는 8명의 당연직 위원(위원장:국무총리, 위원: 국방, 법부, 행자, 복지, 예산, 법제  제주도지사)과 12명의 위촉직 위원( 강만길, 김삼웅, 김점곤, 김정기, 박재승, 박창욱, 서중석, 신용하, 이돈명, 이황우, 임문철, 한광덕 )위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국방부 장관과 국방부 위촉위원(김점곤, 한광덕) 및 경찰측 위촉위원(이황우)의 총 4명을 제외하고는 희생자의 명예회복만을 고려하여 군과 경찰을 가해자로 보는 성향을 보여왔다. 이와 같은 분위기 하에서 국방부 및 경찰 측 위촉위원의 주장은 항상 소수의견으로 취급되고 마는 현상이 계속되었고 경찰측 위촉위원과 필자는 끝없는 고통을 지금까지 감수해야만  했다.  

7. 한 예로 "제주 4.3평화공원"의 명칭을 심의하는 4.3 중앙위원회에서 어떤 위원이  "4.3사건은 먼 역사적 관점에서는 민족의 통일시도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폈는데도 아무도 즉각적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기막힌 사실을 국민 앞에 뒤늦게 양심보고 한다.
따라서 많은 국민과 정부 및 사회의 주요인사들이 그릇된 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 3월 29일 조건부로 채택된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는 희생자의 명예회복만을 위한 피해보고서의 상태로 확정될 가능성이 높을 수밖에 없음을 생명을 걸고 밝힌다.  현재 국방부에는 6.25전쟁의 전후기간 중 4.3'사건'과 유사한 민간인 피해사건이 총 80여건 접수되어 있는데, 진상의 규명보다 명예회복을 우선하는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의 전례가 도미노식으로 퍼져 나갈 때 앞으로의 남북관계에서 대한민국은 정통성의 수호는 물론 국가의 안보에 치명적 손상을 받게 될 것이 명약관화하기 때문이다.

진상조사 보고서에는 피해자와 함께 군·경의 입장도 언급되어야 한다.

1. '00년 5.10일 헌법재판소에 청구된 4.3특별법에 대한 헌법소원이 '01년 9월 27일 각하 되었는데  이 판결문에서 재판관들은 4.3의 발발원인 및 진상에는 여러 견해가 있음을 인정하고 특별법 제 1조가 4.3사건의 정확한 진상규명을 목표로 삼고 있음으로 진상조사를 통하여 그간 감추어지거나 왜곡되었던 제주 4.3사건의 진실이 규명되어야 할 것을 명시했다.

2. 그러나 진상조사보고서의 실질적 문안작성은 4명의 집필위원에 의하여 이루어지면서 3명의 제주도 출신 집필위원은 희생자 측의 주장만 두둔하고 진상규명분야에서 군의 시각과 자료를 반영해야 할 군 출신 집필위원은 고용계약 당시부터 6.25전쟁 이후부분만을 집필한다는 계약이 되어 있어 4.3사건의 규명에 따른 국방부입장 반영은 원천 봉쇄되었다. 이 사실을 확인한 필자는 진상조사 보고서를 심의했던 4.3중앙위원회에서 이 문제의 시정을 위해 감사원의 업무감사를 요청했으나 어떤 조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3. 제주 4.3사건이 외부의 개입이나 지원이 없는 순수한 제주도민만의 의거였다면 군과 경찰은 변명의 여지없이 최대의 과오를 범한 것이 분명하고, 남로당 중앙당 또는 북한과 소련의
개입과  지원이 있었다고 해도 외부의 영향을 예방하고 차단하지 못함으로서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지 못한 군·경의 근본책임은 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희생자의 유가족들은 신고된 희생자 전원의 최대명예회복을 위해 제주4.3사건은 순수한 제주도민들의 민중봉기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정정당당한 명예회복을 원한다면 민중봉기를 논리적으로 입증하든지 또는 군·경측의 진상규명 노력을 조직적으로 방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4. 따라서 지금까지 소수의견에 몰려 진상조사 보고서에 반영되지 못한 4.3사건의 진상규명에 관련되는 군경의 사실자료와 주의 주장은 희생자 유가족 측의 입장과 함께 균형 있게 반영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가 4.3사건에 외부의 개입과 지원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하여 진상조사 보고서에 추가적으로 명기되어야 할 사항을 아래와 같이 요약하면서 대한민국의 역사 앞에 책임을 지기 위하여 최종 채택되는 진상조사보고서에는 심의에 참여할  심사 소위원회와 4.3중앙위원들의 명단이 첨부될 것을 제안한다.

가. 소련군 최고사령관 스탈린과 군 참모총장 안토노프는 광복 1개월 후인 1945년 9월 20일, 극동전선 최고사령관, 연해주군관구 군사평의회, 25군 군사평의회 등에게 점령정책 기본방침을 지시하면서 "북한에 브르좌 민주정권을 수립하라. 민간행정지휘는 연해주 군관구 군사평의회가 수행하라"는 지령을 하달했는데 이는 최초의 북한단독정부 수립지시였다. 어떤 학자는 "이 시점부터 분단의 움직임이 시작됐다"고 평가했다.(한겨레신문, 1993.2.27)

나. 1946년 9월 9일, 조선 공산당 당수 박헌영은 북한 군정의 총책임자인 연해주 군관구 군사평의회 의장 스티코프 장군에게  남한 내 사회단체의 지도요령을 문의했고, 스티코프는 문의에 따른 지시와 함께 막대한 자금을 지원했으며 이런 관계는 동년 12월에도 자금을 보낸 것으로 보아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스티코프 비망록,  http://www.joins.com-북한-북한네트-심층해설-이동현자료실-자료목록 1부터 19까지 참조)  

다. 박헌영은 월북 후 소련군이 남북 총선을 위한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입북을 거부하자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저지하기 위해 남로당 중앙당에 2.7폭동 지령을 내렸다. 이는 남한에 우익정부가 수립되면 남로당의 입지가 상실되는 데 따른 박헌영 개인의 사정도 있었으나 소련군과 김일성의 적화통일 전략의 일부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라. 남로당 중앙당은 제주도당에 2.7폭동지령을 내리면서 단선단정을 반대하고 제주도에 인민공화국을 수립하라고 지시했다. 1948년 1월 22일, 이 지시의 이행과정에서 회합장소가 경찰에 발각되어 220여명이 검거되었으며, 제주도 당은 조직의 와해를 막고 2.7지령의 완수를 위한 2월 중순의 신촌회의에서 김달삼의 주도 하에 무장반격을 결정했다. 이 결정은 최초의 고문치사사건보다 20여일 앞선 시점이었다.
    
  마. 제주도당은 제주도 주둔 경비대 9연대의 동원으로 경찰의 중추인 감찰청과 제주경찰서를 공격하고, 무장 유격대는 경찰지서와 선거관리소등을 습격하는 계획을 세웠으나 4월 3일, 경비대 9연대의 동원이 간부들간의 이견으로 불발로 끝남으로서 남로당은 제주도 전역의 장악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3석의 제헌국회의원 의석 중 투표율저조로 1개지역에서만 국회의원이 선출됨으로서 5.10선거방해에는 2/3의 성공을 거두었다.

  바. 제주도당은 제주도 지역이 석권되면 육지에서도 남로당의 무장반란이 일어나고, 혼란한 틈을 타 김일성이 38선을 넘으면 공산통일이 된다는 씨나리오를 갖고 있었음이 증언과 자료로 입증되었다. (이운방과 김생민 증언, 1948.4.10.-인민해방군 제 5연대 삐라, 1949.1.13-구좌면 투쟁위원회 삐라)

  사. 남로당 제주도당의 군사부장 김달삼은 4.3폭동 발발 4개월 후인 48년 8월 25일(대한민국 정부수립 10일 후), 해주의 남조선 인민대표자 대의원 총회에 참석해서 4.3사건의 전과를 보고하면서 통일된 중앙정부를 언급하고 "조국의 해방군인 소련군과 천재적 영도자 스탈린 대원수 만세!"를 외쳤다. 이 회의에서 김달삼은 360명의 조선최고인민회의대의원에 선출되고, 35명의 주석단에도 올랐다.

  아. 제주 4.3사건의 주동자 김달삼은 남로당 중앙당의 선전부장 강문석의 사위로서  4.3 반란을 일으킨 공로로 49년 1월 8일, 김일성으로부터 북한 고급훈장인 국기훈장 2급을 수여 받았고, 강동정치학원(대남 간첩양성소)을
졸업하고 이 곳에서 훈련된 게리라 부대를 이끌고 남한으로 침투하여 제3병단장으로 태백산지역에서 활동하였다. 김달삼은 현재 평양근교의 애국열사능에서 "남조선 혁명가"의 비문을 받고 있는데, 이는 2000년 3월, 감귤보내기 운동으로 평양을 방문했던 제주도의 우근민 지사가 직접 목격했다.(제주일보, 00.6.8)

            현역의 군과 경찰에 대한 진언과 당부

1. 군과 경찰의 임무는 내 외부의 위협(적)으로부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우리 군과 경찰의 선배들은 그동안 많은 도전 속에서 모범적인 임무를 수행해 왔다고 자부합시다. 군과 경찰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의 자유대한민국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의 임무수행에도 무고한 국민들의 희생은 예방되고 최소화되어야만 할 것이기에, 앞으로는 어떠한 난관 하에서도 완벽한 임무수행이 보장되도록 개인과 소속부대의 능력과 전문성 개발에 더욱 매진해야 할 것입니다.

2. 4.3사건에서 피해를 당했던 제주도 희생자들의 유가족은 비교적 제한된 지역에 장기 기거해 온 반면 참전했던 군·경 요원들은 육지에 분산 거주하며 교류가 없었음으로 오랜 시간이 지난 오늘에 와서는 4.3희생자의 목소리만 들리게 되었습니다. 군과 경찰은 당시의 업무기록을 상황일지 등에 소상히 기록하고 존안 했어야 함에도 심지어는 당시 군법회의의 기록도 미비함으로서 군사재판을 받은 좌익인사의 행적이 모호하며, 현시점에서는 고령으로 인해 필요한 증언의 획득도 어려운 실정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오늘의 군과 경찰은 어떤 경우에도 평소의 임무수행과정에서 성공과 실패에 대한 기록을 사실대로 솔직히 남겨야 한다는 교훈을 철저히 살려주시기 바랍니다.

3. 상대적인 자료의 빈곤으로 요즘에 와서는 4.3사건이 최초의 통일시도였음에도 군경이  과잉진압 했다는 주장까지도 듣게 됩니다. 우리는 이 도전에 바보처럼 더 이상 침묵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에 대해서 그 시도는 분명히 공산화통일시도였음을 밝혀주고, 그러니까      오늘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우리 군과 경찰 선배들의 희생으로 지켜진 것이 아니냐고 큰소리로 주장합시다.

4. 6.25는 실패한 통일시도였고 4.3사건은 최초의 통일시도였다고 감히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그 통일은 적화통일시도였음을 분명히 하고, 4..3사건의 진압과정에서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한 것은 유감이나 당시에 제주도가 무장한 인민유격대에 완전 장악됐었다면 12만명의 주민이 희생됐던 일본의 오끼나와에서와 같은 상륙작전이 감행되어 더 큰 피해가 초래될 수 있었던 가능성도 설명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질문도 합시다. 6.25전쟁에서 정부가 부산까지 후퇴했을 때 국군장병의  신병훈련이 모슬포의 제1훈련소에서 이루어 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를? 모슬포에서 훈련된 국군장병이 없이 미군과 UN군 만으로 한국전쟁의 수행이 가능했다고 보는가?

5. 현역의 군과 경찰은 우리의 선배들이 대한민국의 건국을 반대하고 조직적으로 저항했던 남로당(중앙당)이 인민공화국수립이라는 목표를 숨긴 채 교묘하게 민심을 자극하고 선동했던 게리라전 상황 하에서 국가전복을 막아냈다는 사실에 대한 긍지를 지켜주기 바랍니다. 이를 위해서는 대한민국의 건국역사에 대한 연구와 공부와 토론도 널리 있어야 할 것입니다.  4.3사건 기간 중에 억울한 죽음을 당했던 희생자들에게 위4항에 열거된 사실들이 전파될 수 있었다면 4.3사건은 예방될 수 있었고 희생자의 숫자도 훨씬 적을 수 있었다는 저의 생각입니다.

6. 불행한 것은 국방대학원장까지 역임 후 중장으로 예편한 4.3사건 당시의 연대장(김익열 당시 중령)이 4.3사건은 미군정 하의 경찰부패에 항거한 민중항쟁이었으며 김달삼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요지의 주장을 유고로 사후 발표함으로서 군과 경찰의 공간사를 부정한  사실입니다. 김달삼이 교편을 잡았던 대정중학교와 경비대 9연대의 본부가 모슬포의 구 일본군 병영 내에 함께 위치하여 두 사람 사이에 형성된 교분으로, 김익열은 4.3사건의 진압명령에도 적극대응하지 않다가 폭동발발 1개월 후인 5월 6일에 연대장으로부터 보직 해임되며, 후임자인 박진경 대령이 진압작전에 관심을 두자 영내에서 부하에 의해 암살(6.18)된 후  배후혐의로 조사를 받는 등 4.3과 특별한 인연을 가졌지만, 그가 생전에 위4항에 열거된 사실 들 중에서 김달삼이 월북하여 행한 남조선 인민대표자 대의원 총회에서의 연설문 하나만이라도 살아 생전에 확인할 수 있었다면 국군의 공간사를 부정하는 유고록은 남기지 않았으리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7. 현역의 군과 경찰에게 당부합니다. 군에서는 전쟁에서의 필승을 보장하는 비결로 "목간통 공기집 병기계"의 "9대 전쟁원칙"적용이 평시의 훈련에도 강조됩니다만, 이 중에서 특히 "경계의 원칙"을 일상생활주변에서 까지 실천해 주시기 바랍니다. "경계의 원칙"은 적대하는 외부위협에 지향되어야 합니다만, 군과 경찰의 내부 조직에 대해서 까지 경계의 강도를 높여야 할 위급한 시기가 도래됐다고 생각됩니다. 4.3사건 이전부터 시작되었던 북한 독재정권의 대남 적화통일 시도는 6.15 공동선언이후에도 변함 없이 계속된다고 보는 것이 "경계의 원칙"적용이며 남북의 교류협력이라는 환경의 변화가 북한 대남 공작원들에게 무한대의 활동공간을 허용함으로서 우리 군과 경찰의 조직내부에까지 침투하여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가능성에 유의하고 여기에 대비하는 노력이 더욱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경계의 원칙"이 남북의 대화와 협력에 앞장서는 분들에게 더욱 심도 있게 전파되도록 자유 대한민국을 사랑하고 지켜온 온 국민들과 함께 노력합시다.    
                            2003.9.25
                            한광덕 (예비역 육군소장)  
              4.3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위원회 위원    
                         전 국방대학원 원장


-------

Name    
   한광덕  


Subject  
   국무총리실 출입기자들 앞에서 고함까지 질렀습니다만,


4.3위원회 위원 사퇴선언후 그 이유를 물어 온 곳은  
이북 5도민회의 동화신문과 미래신문이었습니다.  
그간 투고한 글들이 실려있는 site를 소개하고 참고하라고 했습니다만,
"동화"에서는 직접 투고를 부탁해서 쾌히 응했습니다.  

4.3"사건"은 과거가 아닌 오늘의 문제이며  
제주도만이 아닌 대한민국의 문제로서  
북한의 핵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인데  
무관심한 국민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10월 15일 국무총리실 회의장을 나오면서 대기중인 기자들 앞에서  
이성을 잃은 모습으로 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의 졸속 처리를  
고발하며 그 이유도 설명했건만, 뉴스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어제 국회의 통일 외교 안보 청문회에서는 어떤 말들이 나오나
궁금했지만, 중계를 해 주는 방송사 조차도 없었습니다.  

아래 글은 동화신문에 기고한 글입니다.  

2003.10.21일 아침
============================
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 무엇이 문제인가?  

4.3사건 당시 무고하게 억울한 죽음을 당한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은 국가의 책무이다.
그러나 죽었다는 사실만으로 모두가 다 희생자일수는 없으며 죽은 사람 모두의 명예회복을 위해 남로당의 무장 '반란'혹은 '폭동'이라는 사건의 본질과 진상까지 "봉기"로 왜곡할 수는 없다.  

진상조사보고서 작성 집필위원은 4명중 3명이 제주도 출신이었고 1명이 군 출신인데,  군 출신은 6.25전쟁 이후 부분만을 기술한다는 고용계약으로 인해  주요 폭동진압단계에서의 군 관련 상황과 작전단계를 기술할 수 있는 기회가 제한되고 집필위원 상호간의 의사소통 부족으로 4.3사건 진상보고서가 이름과는 거리가 먼 반쪽의 피해보고서로 둔갑되고 말았다.

북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헌법초안 지지결의를 했던 남로당이 인민공화국 수립을 지지하며, 대한민국의 건국을 방해 및 저지하자는 선동에 따라, 제주도 남로당의  인민유격대가 벌였던 무장폭동에 대한 대한민국의 진압 및 소탕작전이었다는 4.3사건의 본질적 측면은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필자는 균형을 상실한 반쪽의 피해보고서가 만들어진 내용과 집필체제의 문제점을 지난 3월 29일 개최된 최초 진상조사보고서 심의 시 지적하고 집필진의 구성과 업무협조체제에 대한 감사원의 업무감사를 요청했었으나 일체의 조치 없이 금번의 수정안 재검토작업이 이루어짐으로서 367건의 수정안이 접수되었음에도 불과 33건의 용어수정에 그치는 형식적인 수정으로 종결되고 말았다.

4.3사건이 남로당의 무장폭동이었다는 사실은 김대중 대통령도 CNN인터뷰(98.11.23)에서 인정했으며 당시의 남로당 기관지였던 "노력인민"의 보도만으로도 쉽게 확인되는데 7명의 정부각료를 포함하는 4.3위원회의 다수가 끝내 무장봉기임을 주장하거나 묵인한 것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조직적인 훈련과 무장으로 경찰서를 습격방화하고 선거관리요원들과 지지하는 인사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한 남로당 무장대의 집단 무력 행위를 민중의 봉기로 인정하게 되면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부정되고 북한은 대한민국의 붕괴를 획책하는 대남 공작기회로  전과 확대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시스템클럽의 지만원 박사(육사22기)는 "시스템을 알면 그 시스템으로부터 발생할 수 있는 현상들은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고,  마찬가지로 현상을 보면 시스템을 짐작할 수 있다"고 했는데 우리는 북한의 대남 공작기구가 어떤 기능을 해 왔는가에 대해서 눈에 불을 켜야 할 대한민국의 안보를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

3.1사건을 4.3사건의 주원인으로 기술한 부분과 4.3사건 당시의 대규모 인명피해에 대한 책임을 대통령의 강경 진압지시와 미군정의 책임으로 전가시킨 표현도 잘못이다.
3.1사건을 4.3사건의 원인으로 보는 것은, "북한은 소련의 군정 하에서 독립국으로 탄생하고 남한은 미국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북한주장을 수용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3.1사건이 4.3폭동의 주원인이라면 제주 4.3사건은 제주 3.1사건으로 명칭을 바꾸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이다.  

4.3 폭동 당시의 강경 진압지시에 대하여 이승만 대통령에게 일방적 책임을 묻는 것은 시정되어야 한다.  대통령은 국가를 수호하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나라를 안정시켜야 함으로 당연히 계엄령을 포함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기 때문이며 오히려 이에 대한 태만이 국가의 존립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부산항 화물연대 노조의  두 번째 강경 파업 시 노무현 대통령의 공개적인 강경 진압 지시가 있었는데 이 때 노조원들이 무기를 들고 경찰에 대항하여 불행하게도 대량피해가 발생하였다면 그 책임을 노 대통령에게만 일방적으로 물어야 할 것인가?
    
4.3사건이 최초 미 군정 하에서 발발했다고 해서 그 책임을 미군까지 소급하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소 군정은 철저한 우익세력의 탄압과 숙청으로 북한 내에서의 폭동을 근본부터 미연에 방지했지만, 미 군정은 남한에서 미국식의 자유를 허용했던 상대적 차이를 인정해야할 것이기 때문이며 미국에 대한 일본의 무조건 항복이 없었다면 48년의 4.3사건은 발생조차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군.경을 대표하는 3명의 위원은 이상과 같은 여러 이유로 금번 채택된 것으로 발표된 진상조사보고서의 신중한 재검토를 주장했으나 총리가 경청하고 수용하지 않은 것은 유감이었다. 총리는 다수결로 정하자는 일부장관과 다수 4.3위원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정상적 투표절차도 없이 결정된 것으로 선언했으며, 경찰을 대표하는 이황우 위원과 군을 대표하는 유재갑 의원과 필자는 그 자리에서 부동의와 항의의 뜻으로 사퇴를 선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방부와 경찰 측 위촉위원들의 공통적인 주장은 진정한 희생자의 명예회복은 최대로 보장되어야 하나 4.3사건의 진상조사 보고서만은 감정이 아닌 역사적 사실에 기초해야한다는 것이며, 그래야만 회복되는 명예의 가치도 더욱 고양된다는 것임을 밝혀둔다.    

2003.10.17.
예비역 육군소장  한    광   덕  
4.3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위원회 위원
---------
ubject  
   대통령의 4.3사건 사과발언에 경악한다(한광덕)


  
                     이황우,유재갑, 한광덕  

                노 대통령의 4.3사건 사과발언에 놀라며

  
화해와 협력에 대해서 누가 반대하고 거부할 것인가?  
그러나 대통령이 4.3 사건의 본질과 진상에 눈을 감은 채  
포장된 평화와 인권만을 위해 화해와 협력을 강조한다면  
그것은 대통령의 국가통수권을 포기하는 행위가 될 것이다.  

국가는 국민의 생명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있음으로  
대통령은 4.3사건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 사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 50년이 지난 오늘의 시점에 와서 꼭 사과를 할 필요가 있다면  
최소한 제주4.3사건의 배후에 대한민국의 건국을 부정하고 방해했던  
남로당의 선동과 지시와 지원이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그 진압과정에서 발생한 억울한 희생자들에 대해 사과해야 옳았다.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위원회」는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여  
7명의 장관과 12명의 민간위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상당수 위원 중에는    
4..3사건을 최초의 통일시도로 보는 견해도 있었음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군과 경찰을 대표하는 3명의 민간 위원들은 지난 10월 15일에 통과된  
「제주 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가 무장폭동의 과잉진압에만 초점을 맞춘 채  
공산무장반란이라는 사건의 본질을 덮고 무장봉기로 둔갑하여 기술함으로서  
동 보고서의 채택의결을 거부하고 현장에서 사퇴를 선언했음을 밝히면서  
노 대통령의 발언이 대한민국의 정통성 부정으로 연결되지 않기를 바란다.  

2003.10.31. 24:00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위원회 위원  
이황우, 유재갑, 한광덕  

   Name    
   존경  


Subject  
   4.3 사태에 대한 공식적 사과를 접하니 참담한 심정입니다.


4.3  사건이 1948년에 일어난 것으로 기억한다.

4.3 사건에 대한 사과 발표를 들으니 기분이 이상하며 머리도 무겁다.

언제까지 이런 비이성적인 사고를 지켜보고만 있어야 할까..

네티즌 들의 의견을 읽어보았다.

어느 분은 무고한 양민의 죽음을 밀하며

다른 분은 진압을 위해 일하다 돌아가신 군경들과 가족들에 대한 사과도

있어야 한다고 했다.

..

4,3 사건에 대한 사과는 곧 북한에 대해  굽히는 것과 같다.

앞으로 그런 대 반란이 일어나면 우리 군과 경찰이 이빨빠진 호랑이 처럼

앉아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


Name    
   지만원  


Subject  
   [re] 4.3 사태에 대한 공식적 사과를 접하니 참담한 심정입니다.


정통사관을 좌익사관으로 바꾸어 놓는 좌익들의 의도가 무엇일가요?

저들은 대한민국 건국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민족이라는 단어를 내걸며 김일성은 민족의 원수인 친일파를 깨끗이 숙청했기 때문에 민족과 역사의 정통성이 북한에 있다 합니다.

무서운 의도이니 행간을 읽고 착안하여 서로 의견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의견들을 누군가가 집대성해야 할 것입니다.  
----------

 

 
Today:
Total:
 
   NORTH KOREA NEWS  |  SOUTH KOREA NEWS  |  U.S. NEWS  |  NEWS IN ENGLISH  |  커뮤니티  |  L.A.생활  |  전문가 상담  |  Contact Us  |  About Us
Copy Right (c)  1999-2010  www.unitypress.com  Info@unitypress.com            web design by StouchDesig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