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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사태시 침투한 당시 북한 군 61 저격여단 대대장 이 봉원? 10/25/2003
이봉원(李奉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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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함북출생
49년 김일성종합대학철학부에 입학
53년 모스크바종합대학으로 유학:수석졸업
56년 당조직지도부 지도원으로 당간부생활을 시작
57년 당지도부 부부장
70년 개성시 당 책임비서
70년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
74년 황남 도당 책임비서 겸 인민위원장
75년 황해남도 책임비서
76년 제2집단군 정치위원으로 파견(정치군인시작)

(1980년 5월 광주사태 발생)

80년 10월 당중앙위원·군사위원에 각각 선출
84년 중장
85년 상장
86년12월 총정치국 부국장(상장)
92년 대장

95년2월 인민무력부장겸 총전치국장 오진우 사망후 지지세력 잃음
95.10 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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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원 대장은 인민군 총정치국 제1부총국장을 맡고 있으며 당중앙위원·군사위원이다. 어린시절 부모를 따라 간도지방으로 이주해 서당·야학을 다닌 이봉원은 아버지가 빨치산 전사자였던 덕택에 만경대혁명학원1기생으로 졸업했으며 1949년에 김일성종합대학철학부에 입학했다. 1953년에 모스크바종합대학으로 유학갔다가 1956년에 귀국해 당조직지도부 지도원으로 당간부생활을 시작했다. 책임지도원시절에 함남도당을 담당, 반종파투쟁 이후의 잔존분자 색출에 공을 세운걸로 유명하다. 그뒤 조직지도부에서 계속 근무해 1967년에 부부장까지 올라갔다. 조직지도부 시절에 김정일과 돈독한 관계를 맺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개성시 당 책임비서(1970년 8월), 황해남도 책임비서(1975년 5월) 등 당업무를 주로 맡은 그는 개성시 책임비서 시절 [붉은 시민화」 구호를 앞세워 개성 토박이에 불순분자 딱지를 붙여 타지역으로 추방했던 장본인이다. 그러다가 1976년에 돌연 제2집단군 정치위원으로 파견되면서 [정치군인」의 길을 걷게 된다(1984년 11월 중장, 1985년 4월 상장, 1992년 4월 대장). 그 해에 김정일이 군 정치사업을 강화하기 위해 일부 당간부들을 [정치위원」으로 임명, 군복을 입혔기 때문이다. 군내에 김정일 유일지도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는 일찍이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됐으며 1980년 10월의 6차 당대회에선 당중앙위원·군사위원에 각각 선출됐다. 이봉원은 1986년 10월부터 군총정치국 부총국장을 맡아왔다. 총정치국장을 인민무력부장 오진우가 겸했기에 총정치국의 실무는 이봉원이 전담하다시피 해왔다. 1995년 2월 오진우가 사망하자 이봉원이 총정치국장으로 승진할 것으로 예상되어 왔지만 10월 군부인사의 뚜껑을 열고 보니 공군사령관 조명록이 총정치국장으로 자리를 옮겨오고 이봉원은 변화가 없었다. 김정일이 빨치산 원로들을 계속 우대하는 상황에서 그들과 사이가 나쁜 것으로 알려진 이봉원을 발탁하는 것이 무리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 귀순자 강명도씨는 『김정일의 신임을 잃은 이봉원은 단지 거품파워만을 갖고 있을 뿐』이며 『눈치 빠른 소장파 장교들도 그를 이미 종이 호랑이로 간주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오진우-오극렬 갈등관계를 부추겨 중간에서 어부지리를 누려왔지만 능력부족과 인사철이면 뇌물에 집착하는 개인행태 때문에 머지않아 자리에서 떨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김정일 생일 경축연회와 군부의 충성집회에 빠짐없이 모습을 나타냈다. 김정일의 군부대시찰에도 그림자처럼 붙어다녔다. 1995년 정초의 214군부대를 비롯해, 1월 인민군 9차 선동원대회 참가자들 접견 및 무용조곡[장군님 받들어 군민은 한마음」공연 관람, 2월 291군부대 여성해안포중대 및 해군 155군부대 시찰, 3월 집단체조 [영원히 높이 모시리」 참관 및 인민군협주단 공연 [장군님 따라 부르는 심장의 노래」 관람, 3월 인민군 중대장·중대정치지도원대회 참가자들과의 기념촬영, 4월 군창건 63주년 기념 1017군부대 방문, 7월 금수산기념궁전건설참가자들과의 기념촬영, 8월 인민군 훈련일꾼회의 참가자들 접견 등 김정일이 군부대를 방문할 때마다 어김없이 현지에 대기하거나 배석했다. 그러나 최근들어서는 거의 공석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어 일부에서는 그의 실각을 조심스럽게 거론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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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 (2003-10-24 22:42:56, Hit : 135, Vote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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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군, <광주사태> 남침을 전술학으로 활용



1980년 5월 광주사태에 남파, 계엄군과 대치했던 당시 북한 군(61, 62 저격여단. 당시 61 저격여단 대대장은 이 봉원)이 광주 지역에서 "전투"한 실전경험을 현재 훈련 교육용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광주사태가 진정된 후 부터 북한 전역에선 {북한 특수부대에서 광주에서 전투를 했다}는 소문이 퍼졌고 제보자 탈북자 아무개 씨는, {나는 1981년 군사학교에 입학한 후 부터 우리 특수부대가 광주 사태때 내려 갔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당시 침투 북한군은 해상은 목포 항을 통해 광주로 집결했고, 낙하산을 이용 침투한 육상 침투조는 낙하산을 타고 내장산에 투하되었던 것으로 안다. 지금도 북한의 육상 침투조의 최종 투하지점은 내장산으로 알고 있다. 낙하산을  침투조는 무동력 기구를 타고 내려 오고, 해상 침투조는 핵동력 잠수함 300톤 급을 타고 온다. 기관사 등 20 여명이 승선하고 주로 공해를 거쳐 동해바다에 침투한다. 도착 지점은 강원도 지역이 아닌 부산, 포항, 남해, 삼천포, 제주도 지역 이다.  나도 남침할 때 동력 잠수함을 타고 왔었다...}고 밝히고,

{광주사태 당시 총검으로 부녀자들을 죽인 군은 우리 북한 군이 아니고 거의가 남조선 공수부대 요원들이었다고 알고 있다. 그 때  환각제 등을 먹은 남조선 공수부대가 그런 짓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남침조에서 광주 사태 당시 찍은 사진이 현재 북한 군부대 등에 전시되어 있다. 사진을 보면 당시 남조선 특전사 등 공수부대원들의 얼굴이 다 나와 있다.  당시 탱크탈취는 남파 특수부대에서 했다. }

다시 그는 {당시 작전을 총지휘했던 책임자는 이 봉원 대대장이었고, 그는 김 일성 수령으로 부터 영웅칭호를 받고 태천군관학교 교장으로 승진했었다. 그가 당시 철수명령을 받고도 하루 늦게 철수 한 의혹 등 때문에 조사를 받고(이 인모 노인 북한에 돌아 온 후 남한에서 전향서 쓴 사람들이 많다고 폭로, 많은 위장 전향자들이 검거 소동이 일어났다고) 제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전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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