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노무현 대통령이 TV프로그램에 출연해 소설 ‘칼의 노래 ’를 추천, 주목을 받았다. 강금실 법무장 관은 지난 2001년 이 책에 대해 서평을 발표하기도 했다. 작품성 자체로 이미 높은 평 가를 받고 있는데다 이래저래 현 정권 실세들이 애독하는 책으로 인연이 깊은 것 같다.
이 책은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소재로 임진왜란 당시 그가 겪었을법한 내적 갈등구조를 간결하고 리드미컬하게 묘사한 것 이다. 강 법무장관은 서평에서 “세상을 베어 삶의 순결성에 이 르고자하는”이라 는 시적 표현까지 남겼다.
하지만 읽은후 뇌리 에 남는건 그런 낭만적 표현보다 오히려 냉혹할 정도로 ‘법과 원칙’에 집착하는 이순 신 장군의 몸가짐이었다. 역사적 사실까지 그런가싶어 난중일기 자체를 구해 읽어봤는데 마찬가지였다.
젊은 권관으로 재직중 상관이 관사 마당에 있는 나무를 캐 자기 집으로 옮기려하자 국가 재산이라며 반 발, 죽도 록 미움을 사더니 난중일기 시기에도 이런 태도는 전혀 변함이 없다. 좀 더 예를 들어보자.
“박몽세는 석수인데 선생원 돌뜨는 곳에 가서 해를 끼치고 이웃 집 개에게까지 피해를 입혔으므로 곤장 여든대를 쳤다.”(1592년 음력 정월16일)
“이날 여도 수군(水軍) 황옥천이 달아났다. 자기 집에서 잡아와 목을 베어 군중 앞에 높이 매어달았다.” (5월3일) 거짓말에도 용서는 없다. “옥과의 향소(鄕所)는… 매양 속이어 허위보고를 했다. 그래서 오늘은 사형에 처하여 높이 매달아 보 였다.”(1593년 6월8일)
“강진 현감(이극신)의 기일 어긴 죄를 처벌했다.”(1596년 2월1 3일) 특히 경상수사 배설과의 관계는 충무 공의 참모습을 읽게해주는 대목이다. 배설은 원균과 함께 싸우다 전투현장을 이탈하는데 이 후 이순신 삼 도수군통제사 밑에 배속됐다가 명량해전 직전에 다 시 도망쳐버렸다. 이순신은 병사를 풀어 수색하지만 행방이 묘연 하다. 이때의 상황을 ‘칼의 노래’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 다.
“(이순신은)도원수부에 서찰을 보내, 조선팔도를 다 뒤져서라도 배설의 머리를 우수영으로 보내야 한다 고 당부했다. 도원수(권 율)는 알았다는 답신을 보내왔다.”
배설이 다시 등장하는 것은 임진왜란사의 끝자락에서다. 이순신 은 이미 전사했지만 배설은 끝내 권율 장군에게 잡히고 한양으로 압송돼 사형에 처해졌다. 국정문란과 부패, 백성의 피폐로 몰락 해가는 왕조임 에도 불구하고 곳곳에 뿌리박혀 있는 일선 지도자 들의 치열한 법정신은 종묘사직을 떠받치는 버팀목이었 던 셈이다 .
충무공은 자신의 일기에서 단 한번도 대화와 타협으로 나랏일을 처리해 나갔다는 흔적을 남기지 않았 다. 백성에게 잘보이고 싶어 하는 선정(善政) 콤플렉스는 애당초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법과 원칙의 집행이라는 측면에서 그는 냉정한 사람이었다. 그래 도 백성은 죽도록 그를 따랐다.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돼 전남 순천에 당도했을 때였다. “늙 은 할아버지들이 길가에 늘어서서 술병 을 다투어 바치는데 받지 않으면 울면서 억지로 권했다”(1597년 8월9일)고 일기에 적고 있다.
이순신의 조카인 이분이 쓴 ‘행록’ 안에 “그는 진중에 있으면 서 항상 군량때문에 걱정하여 백성을 모아 둔전을 짓게하고 고기 를 잡게하며 소금을 굽게하고 질그릇을 만들게 하는 등 안하는 것이 없었고…”라 는 구절이 들어 있다.
그뿐인가. 틈만 나면 병사를 모집하고 전선을 수리·건조했으며 화약을 제조했다. 심지어 된장을 담아 찬 거리까지 마련해야했다. 이 모든 것이 난중일기에 적혀 있다. 그런데도 막상 자신을 모 함하는 당파인 서 인(西人)이나 사간원에 관해서는 단 한줄도 적 어놓은게 없었다.
국정주도력 상실감이나 언론과의 맞대결 등으로 어려움을 토로하 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이 8·15를 기해 새롭게 국면전환을 꾀하 고 있다. 마침 오랫동안 ‘칼의 노래’를 애독했다기에 이 책의 주인공을 빌려 사족 (蛇足)을 달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