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1998년5월 스위스 거쳐 망명, 金正日의 스위스 런던 등 해외비자금에 대해 정보제공. 미국정부, 뉴욕 證市에 투자된 金正日 비자금 동결. 미국측에 金正日 망명을 주선하겠다고 제의하기도.
ㆍ「金正日의 요리인」후지모토 겐지 증언: 『金正日 부부와 잘 어울리던 고영숙 부부 가족이 98년 이후 보이지 않아 의아하게 생각했었다』. 우리 정부 인사도 남편 朴씨 면담. 망명 이유는 『너무 많은 비밀을 알고 있어 살해될까 두려웠다』
우종창 月刊朝鮮 기자〈woojc@chosun.com〉
미국정부, 신분 확인후 망명 허가
金正日의 애처(愛妻) 高英姬(50세)의 여동생 고영숙(45)과 그의 남편(朴모ㆍ40대 후반)이 1998년5월에 스위스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여 현재 미국정부 보호하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 18일 발간된 月刊朝鮮 9월호의 보도로 밝혀졌다. 金正日의 처제인 고영숙 부부는 망명후 미국 정보기관에 金正日의 해외 비자금에 대하여 중요한 정보를 털어놓았다고 한다.
미국 정부는 이 부부로부터 金正日이 뉴욕과 런던의 주식시장 및 스위스 은행에 비자금을 투자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뉴욕 시장에 투자한 자금을 동결시켜버렸다고 한다. 月刊朝鮮은 고영숙 부부를 면담 조사했던 미국측 인사와 한국 정부 당국으로부터 망명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망명 당시 미국 국무부에 근무했던 한 高官에 따르면 고영숙 부부는 스위스에서 생활하던중 스위스 주재 미국 대사관을 통해서 망명을 신청했다고 한다. 미국 당국에서는 이 여인이 과연 高英姬의 여동생인지 확인하는 데 꽤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틀림없다는 확신이 들자 망명신청을 받아들이고 미국 정부의 보호하에 두고 신문을 시작했다고 한다.
고영숙은 망명 동기에 대해서 『金正日에 대해서 너무 아는 것이 많아 그 때문에 살해되지 않을까 두려웠다』고 설명했다고 한다. 고영숙의 남편 朴모씨의 신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스위스는 金正日이 40억 달러로 추정되는 비자금을 예치하고 있는 곳이고 별장도 있어 金正日의 친족들이 유학도 하고 유람도 하는 근거지이다.
고영숙은, 언니 고영희와 金正日 사이에서 난 두 아들 正哲ㆍ正雲이 스위스 베른 근교 빌라에 살면서 국제학교를 다닐 때 따라와 이들을 보살펴 주는 일을 한 적도 있다. 고영숙은 북한 외교관 신분을 갖고 있었으며 이 빌라의 소유주로 등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5년 전 고영숙의 남편 박씨와 면담한 한 인사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40대 후반의 아주 세련되고 자존심이 강한 인상이었다고 한다. 朴씨는 『金日成 사망 후 金正日이 굉장히 불안해 하고 있다. 내가 나서서 그를 미국으로 망명하도록 주선할 용의가 있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고영숙 부부가 탈출한 시기는 金正日 정권의 핵심부가 大飢饉(대기근)사태로 한창 흔들리고 군부와 측근에서 반란모의가 잇따르고 黃長燁씨가 탈출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을 때였다. 미국 정부 일각에서는 고영숙 부부 망명후 북한의 비상사태시 金正日을 스위스로 망명시키는 공작계획도 검토한 적이 있다고 한다.
한편 10여년간 金正日의 전속 요리사로 있다가 2년 전에 탈출했던「金正日의 요리인」저자 후지모토 겐지씨는 月刊朝鮮 기자에게 아주 흥미로운 증언을 했다. 『고영희의 여동생 부부가 아들을 데리고 와서 金正日 집안 사람들과 자주 식사를 하고 놀았다. 이 여동생의 아들은 김정일-고영희 부부 사이의 둘째 아들 김정운과 친하여 농구도 함께 하곤 했다. 그런데 1996년에 내가 일본으로 일시 귀국하였다가 1998년6월에 돌아가니 고영희의 여동생이 전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제야 짐작이 간다』
고영희는 1953년생으로 올해 쉰이고 미국으로 망명한 고영숙은 다섯 살이 아래이다. 고영희는 제주도 출신의 재일교포 고태문의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고영희는 북한의 만수대 예술단이 1973년 일본에서 공연을 가질 때 단원으로 참가, 일본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이때 처음 일본언론에 고영희 얼굴이 공개되었다.
일본 공영방송 NHK 취재진에 따르면 고영희의 아버지 고태문은 일본의 유명한 유도 선수인데, 이북 출신의 일본 프로레슬러 力道山과 친했다고 한다. 고태문은 力道山의 도움으로 북한을 방문, 金日成 앞에서 유도 시범을 보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고태문 가족은 1960년대 초, 北送船(북송선)을 타고 북한에 들어갔다.
고영희는 만수대 예술단원 시절인 1974년 무렵 金正日의 눈에 띄었다. 金正日은 자신의 별장 중 하나인 창광산 관저(평양 소재)에 고영희를 들여 앉혔다. 안기부 출신의 한 고위 관계자는 『고영희에 대한 金正日의 애정이 대단하다는 것을 여러 모로 확인했다』고 말했다. 金正日의 요리사를 지낸 일본인 후지모토씨는 『고영희를 알고 난 뒤부터 金正日의 여성 편력이 줄었다』고 말했다.
여동생 부부의 탈출 망명 이후에도 高英姬에 대한 김정일의 애정을 변치 않고 있고, 작년 말부터 북한군에선 고영희를 우상화 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는 고영희의 소생을 김정일의 후계자로 옹립하기 위한 전초 작업이 아닌가 관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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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3代 권력세습 결정 - 前 노동당黃長燁 사상·국제 담당 비서 확인 인터뷰
고영희 우상화 캠페인 文書의 성격
『이럴 줄은 알았지만, 정말 어처구니가 없어서…』
●정철이를 후계자로 세우려고, 고영희를 본처로 내세울 수도 있을 것 ●고영희의 이름을 주민들에게 알리고, 여맹위원장 같은 자리에 앉히는 게 다음 수순
金演光 月刊朝鮮 차장대우 (yeonkwang@chosun.com)
고영희 소생의 아들이 둘
『이럴 줄은 알았지만, 정말 어처구니가 없어서…』
黃長燁(황장엽) 前 북한 노동당 사상·국제 담당 비서는 북한 인민군의 비밀 학습자료를 일별하고 나서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黃 前 비서는 이 자료의 성격에 대해 『김정철이를 후계자로 만들려는 것』이라고 했다.
1997년 대한민국으로 망명한 黃 전 비서는 金日成 종합대학 총장, 최고인민위원회(한국의 국회에 해당) 의장, 노동당 사상·국제 담당 비서를 지내, 金日成과 金正日의 주변에서 벌어진 내밀한 사건들을 직접 접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북한 주체사상의 이념적 틀을 마련한 그는 金正日의 金日成 종합대학 스승이기도 하다.
북한에서는 金正日의 여자관계, 자녀 문제는 극비사항이다. 일반 주민들은 金正日의 부인이 누구인지, 아들이 몇이나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
이 때문에 한국의 정부 당국자들 사이에서도 「金正日이 정식 결혼한 본처가 누구냐」에 대해서조차 해석이 엇갈리고 있다. 1974년 결혼한 김영숙이 본처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지만, 「김영숙도 金正日이 함께 살고 있는 여자의 하나일 뿐」이라는 주장이 만만치 않다.
黃 전 비서에게 복잡하게 얽힌 金正日의 家系(가계)와 3代 권력세습의 가능성에 대해 물어보았다.
―金正日이 정식 결혼한 부인은 누구인가요.
『김영숙이 본처지. 그런데 아들을 못 낳았어. 설송이라고 딸이 하나 있고. 함경북도 안전국의 전화교환수로 일하다가 노동당 조직국으로 옮겼고 金正日을 만났어요』
―金正日과 김영숙의 결혼식에 참석하셨습니까.
『북한에서야 교회에서 하는 것도 아니고, 주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직장에서 잠깐 하는 경우도 있지. 했다는 건 알지』
―고영희는 아십니까.
『(일본에서 온) 귀국동포로 알아요. 무용수였지. 아들을 둘 낳았는데, 큰애가 김정철이고 그 아래 아들이 두 살 터울이야』
―고영희와 金正日 사이에는 아들이 김정철 하나만 있는 것으로 한국에는 알려져 있습니다.
『둘이오. 金위원장(金正日)이 1991년에 다른 여자로부터 또 아들을 하나 얻었는데, 누구 아이인지는 모르겠어요』
―고영희는 정식 부인이 아닌데 북한에서 어떤 지위입니까.
『본집에는 김영숙이 살고, 다른 여자들은 집이 달라. 고영희가 사는 집은 본집하고 멀리 떨어져 있어요. 우리는 「무슨 댁」 「무슨 댁」 하고 불러. 자기 아버지(金日成)도 알기는 했겠지만, 여자들을 전부 부인으로 데리고 산 거지』
―金正日의 부인이라고 할 수 있는 여인은 몇 명입니까.
『본처 김영숙을 빼고 셋이지. 성혜림, 고영희 그리고 한 여자가 더 있었는데 이름은 모르겠어요』
고영희를 본처로 내세울 가능성
―혹시 홍일천이라는 여성 아닙니까.
『그건 모르겠어』
―인민군의 비밀 학습자료를 보면 「존경하는 어머님」이 누구인지 나와 있지 않습니다. 「최고사령관을 가장 몸 가까이에서 보좌해 드린다」고 나와 있는데, 본부인인 김영숙일 가능성이 있겠습니까.
『(金正日은) 고영희를 더 사랑해요』
―이 자료에 보면, 「존경하는 어머님」이 金正日의 전선 군부대 시찰을 따라다닌다고 돼 있습니다. 실제로 따라다닙니까.
『따라다니는데 누구라고 소개는 안 하니까. 간호사인지 누군지 알지를 못해. (金正日이) 술파티에 나올 때는 여자를 꼭 하나씩 데리고 나와요. 金正日이 「이 여자가 나를 죽이려고 한다」고 농담을 하기도 하고』
―북한군인들이 이 자료를 읽다가 「존경하는 어머님」이 누구인지 궁금해하지 않겠습니까. 金正日의 부인이 누구인지가 북한에서는 비밀이라면서요.
『병사들이 「어머님」이 金正日의 부인이라는 건 짐작하겠지. 김정철이를 후계자로 하려면 고영희를 본처로 내세울 수도 있을 거야』
김정남은 북한에 못 들어간다
―그 다음은 어떤 조치가 이어질까요.
『이름을 알리고, 중앙 여맹위원장을 시킨다든지』
―북한 인민군에게 이 시점에 「존경하는 어머님」을 갑자기 드러내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김정철이를 후계자로 만들려는 거지. 나는 김정남이는 절대 안 된다고 계속 얘기를 했어요. 후계자는 왕이 사랑하는 여자의 아이가 되는 거니까. 성혜림이 오래 전에 떨어져 나갔고, 金正日은 고영희를 가장 사랑하는 게 사실이야』
―김정남은 현재 일본과 중국을 떠돌아 다니고 있습니다. 김정철 후계구도가 확정됐다면, 북한 내부에서 김정남의 앞날이 상당히 불안해졌다고 봐야겠습니다.
『(북한에) 들어가지도 못해요. 머리가 있는 사람이라면 들어가서 죽으려고 하겠어?』
―김정남은 안 된다고 보신 이유가 뭡니까.
『여자가 떨어져 나가면 太子(태자)라는 게 갈릴 수밖에 없지. 그리고 김경희(김정일의 여동생) 장성택(김경희의 남편)이가 그렇게 김정남이를 싫어해. 우리 아이가 김정남이하고 태권도를 하고 노니까, 장성택이가 「저 놈하고 놀지 못하게 하라」고 얘기를 해』
―김정숙 우상화와 金正日 권력승계가 함께 진행된 것을 감안하면, 고영희 우상화와 김정철 권력장악이 동시에 진행되겠군요.
『그렇게 할 수 있을 거야』
―金日成은 언제 아들에게 권력을 넘겨주려고 마음을 먹었습니까.
『1960년대에 들어서 金正日에게 주겠다고 얘기를 해. 그렇지만 감히 내놓고 얘기는 못하고. 공산주의자들이 「그게 말이 되느냐」고 하니까』
―金正日이 후계자로 공식 지명된 것이 1974년이고, 이미 1973년에 金正日을 지칭하는 「당 중앙」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지 않았습니까.
『「당 중앙」은 자기가 만든 말이야. 그 전에는 김영주(金日成의 동생)가 후계자나 다름없었는데, 신경쇠약에 걸려서』
―북한 권력층 안에서 『金正日이 金日成의 후계자가 됐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된 건 언제쯤입니까.
『노동당 비서에 임명된 때지』(金正日은 1973년 9월에 노동당 중앙위 비서로 임명됐다)
―金日成이 「내 아들 金正日이 후계자다」고 선언하는 자리가 있었습니까.
『그런 건 없었어요. 벌써 얘기가 다 돌았고. 1974년 정치국원 회의에선가 金日成이 「나는 한 1년 더 있다가 하려고 했는데, (여러분들이) 그렇게 하자면 하지 뭐」하고 얘기를 했어』
―1974년에 나온 「유일사상 체계 확립을 위한 10대 원칙」이 金正日 권력승계를 합리화하기 위한 이론적 토대가 됐죠.
『그 그룹들이 만든 거지. 그 무렵에 金正日이가 나한테 전화를 했어요. 「삼촌(김영주)이 주체사상에 반대하는데 가서 설득을 해 달라」는 거야. 김영주가 사람은 괜찮은데 머리가 못 따라가요. 「주체사상이 마르크스 레닌주의와 안 맞는다」고 해서 내가 얘기를 해줬어요. 그때 김영주가 「우리 집안에서는 정일이를 후계자로 내정했다」고 해. 내가 「그러면 다 그만두고 나하고 같이 철학이나 공부하자」고 했어요. 김영주가 그때 당 조직비서로 건재할 땐데도 그런 얘기를 했어. 좀 있다가 부총리로 쫓겨났지』
黃長燁의 걱정
―金正日과 대립했던, 김성애와 그 아들 김평일의 처지는 요즈음 어떻습니까.
『김평일이가 아버지한테 「왜 차별하느냐」고 하니까, (김일성이) 「형은 제 힘으로 해서 달라」라고 해요. 「내가 죽으면 너희는 다 죽는다」고 겁도 주고. 김성애와 김평일이 이제 힘이 없어졌으니까. 김평일이는 핀란드 대사 하다가 다른 데로 갔고』
―김영주·김성애는 어떤 상태인가요.
『다 보호받으면서 사니까 軟禁이지』
黃 전 비서는 『金正日이 여자를 100명을 데리고 살더라도, 주민들만 굶겨 죽이지 않았으면 내가 한국으로 뛰쳐나올 이유가 없었다』며 『金正日은 주민들을 굶겨 죽이고, 정치범 수용소를 만들어 인간을 말살하는 말 그대로 惡(악)의 축』이라고 했다.
그는 『金正日과 타협하고 그를 지지하면, 북한 인민은 죽어도 좋다는 얘기』라며 『왜 이렇게 金正日을 좋아하고, 살려 줘야 한다는 사람이 남쪽에서 늘어 가느냐』며 한참동안 걱정하는 얘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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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3代 권력세습 결정 - 人民軍 비밀문서 분석
제2의 김정숙이 될 「존경하는 어머님」은 누구일까?
金美英 자유기고가
왜 「어머님」은 匿名化했나
金正日은 아버지 金日成을 神의 경지에 올려놓는 우상화 작업을 주도해 후계자로 지명되는 데 성공했다. 그때까지 金正日의 가장 큰 악몽은 庶母(서모) 김성애와 그녀의 소생들이었다.
권좌에 오른 金正日은 1970년대 중반 이후 이른바 「곁가지」 제거 작업을 대대적으로 진행한다. 이들과 겨뤄 이기기 위해 金正日은 아버지에게 극에 달한 아첨을 했던 것 말고도, 자신이 「嫡子(적자)」라는 점을 최대한 활용했다.
피살된 이한영씨는 그의 책 「대동강 로열 패밀리 서울 잠행 14년」(동아일보사, 1996년)에서 金正日의 빨치산 동료였던 최현(前 인민무력부장)이 『당연히 長男이 이어받아야지』라며 장남 金正日로의 권력승계를 지지했던 장면을 소개하고 있다.
근대성을 바탕으로 한 사회주의 체제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장면이겠지만, 無學(무학)의 빨치산 출신 노인들에게 조선시대로부터의 長子(장자) 승계 관습은 자연스러웠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최현은 그 덕분에 金正日 시대에 아들 최용해와 더불어 급격히 부상했다. 金正日은 봉건적 「嫡統(적통)」의 개념을 살려 권력승계를 완수할 수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金正日의 후계자가 될 아들들에게는 내세울 「어머님」이 없다.
金日成의 항일투쟁 경험을 과대포장해서 권력유지의 도구로 삼은 북한에서, 金正日은 生母 김정숙을 「혁명 열사」로 추앙해 抗日(항일) 경험이 없는 자신의 취약점을 보완했다. 金正日은 자신의 아들에게 「만경대와 백두산 혁명일가」의 嫡統을 선사하기 위해 고심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月刊朝鮮이 입수한 인민군 내부 교육자료에는 「존경하는 어머님」이 익명으로 등장하고 있다.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최고사령관 동지에게 끝없이 충직한 충신 중의 충신」의 이름을 알리지 않았다는 것은 북한의 관행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다. 북한은 「영웅 만들기」와 「따라 배우기」로 수많은 영웅을 탄생시키는 방법으로 국민들을 동원해 왔다. 「정춘실」, 「길영조」, 「진응원」…, 영웅들의 이름은 셀 수 없이 많다.
따라서 「존경하는 어머님」은 金正日이 아직 당당하게 내세울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님이 분명하다. 본부인 김영숙을 우상화할 의도였다면 굳이 그녀의 이름을 숨길 이유가 없다. 자료에는 「존경하는 어머님」과 최고사령관의 관계에 대해 「충신」, 「호위전사」, 「제1보좌관」으로 호칭하고 있다.
「최고사령관을 가장 몸 가까이에서 보좌해 드린다」는 표현을 보면 살을 맞대고 사는 사람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두 사람이 정식 배우자임을 암시하는 대목은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당당히 내세울 수는 없으나 이쯤에서 등장시키지 않으면 안 될 베일 속의 이 여성은 누구일까?
인민군의 교육자료가 후계구도를 염두에 둔 勞作(노작)이라고 한다면, 「존경하는 어머님」은 김정철의 어머니 고영희임이 분명하다. 북한 소식에 정통한 한 인사는 『최근 金正日이 현지지도에 고영희를 동반한 것이 목격되고 있다』고 말했다.
왜 고영희인가
고영희가 본처 김영숙에 대해 우위를 점하는 것은 金正日의 총애를 받아 왔다는 점이 있지만, 무엇보다 아들을 낳았기 때문이다. 김정철의 生母에게 「김정숙과 같은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불가피한 조작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권력 승계 과정에서 金正日이 40代인 젊은 아버지를 부축하고 다녔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金正日은 1974년 2월 내부적으로 후계자로 정해지고, 1980년 제6차 당대회를 통해 공식 등장했다.
金日成 우상화는 광복 직후 북한 체제 형성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북한 체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을 이룬다. 그러나 스탈린이나 毛澤東(모택동)의 우상화 수준과 비견될 수 없는 「神格化(신격화)」의 경지에 이른 金日成 우상화는 金正日의 등장과 궤를 같이해 왔다. 1964년 당 조직지도부 지도원으로 정치수업을 시작한 金正日은 이른바 「유일사상 10대 원칙」이라는 金日成 우상화의 정전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당헌과 헌법을 넘어서는 이 폭압적 규범은 북한 인민들의 눈과 귀를 막아 철저히 인권을 유린하는 도구로 기능함으로써 북한 공포정치의 상징이 되었다.
대대적인 김정숙 우상화
1980년대 권력을 쟁취한 金正日은 점차 金日成 개인 우상화에서 家系 우상화로 우상화의 정도와 수준을 확대해 갔다. 金正日 자신의 출신지를 舊소련 하바로프스크에서 백두산 밀영으로 바꾼 것, 金日成이 직접 金正日을 우상화하는 頌詩(송시) 「광명성 찬가」를 지어 바친 것이 대표적인 실례일 것이다.
金日成 사후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金正日의 生母 김정숙을 대대적으로 우상화한 것이다. 이제 북한 공식매체는 金日成·金正日·김정숙을 묶어 「3대 장군」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1996년 각 軍의 소대 단위 내무반에 이들 3人의 초상화를 한 장으로 인쇄한 「3대 위인상」이 부착되었다고 한다.
이른바 현지지도 「말씀판」에 김정숙의 발언이 등장하고, 「불멸의 백두 여장군」, 「혁명의 어머니」, 「탁월한 정치활동가」, 「위대한 혁명가이자 공산주의 혁명 투사」등의 미사여구가 새로 그녀에게 바쳐졌다. 김정숙 관련 기록영화 「어머님의 총소리 영원하리라」가 제작되는 한편 그녀의 사진을 담은 우표와 우편엽서도 등장한다.
金正日 등장과 함께 서서히 진행돼 온 김정숙 우상화 덕분에 사람 이름을 딴 북한의 행정구역과 학교 중 김정숙의 이름을 딴 곳이 가장 많은 형편이다. 1981년 8월 양강도 신파軍을 김정숙軍으로 개명했고, 신파 여자고등학교와 혜산 제2사범대학은 김정숙 여자고등학교, 김정숙 사범대학으로 개명했다. 함북 경성 요양소는 김정숙 요양소로 개명하고, 평양에 김정숙 탁아소를 지었다. 평남 평성市에는 김정숙제1고등학교가 있다.
金日成 死後에는 김정숙의 동생 김기송도 우상화 대상에 포함된다. 북한에서 딱히 攻을 세운 것도 아니고 잘 알려진 인물도 아니었는데 김정숙 우상화 분위기에 편승해 부각되기에 이른 것이다.
1995년 8월 회령 고등중학교는 「김기송 고등중학교」로 개명됐으며 「김정숙과 함께 항일 혁명투쟁에 참가하여 영웅적 위훈을 세운 소년 혁명가」, 「항일 아동단원들의 전형」으로 찬양됐다. 8월에는 그의 동상도 건립되었다.
月刊朝鮮이 입수한 인민군 학습자료는 3代 권력세습의 전초작업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우리는 조만간 북한 전역에 펴져 가는 위대한 어머님 「고영희」의 이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 日紙 "김정일 부인 고영희 중태인듯"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부인 고영희(50)씨가지난 달 하순 교통사고를 당해 중태인 것으로 파악됐다고 산케이(産經)신문이 10.7일 보도했다. 고씨는 승차중에 사고를 당해, 머리를 크게 다친 것으로 보인다고 산케이는 북한 소식통을 인용해 전했다.
최근 북한에서는 김정일 위원장의 후계구도를 놓고 고씨에 대한 우상화 작업이진행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 고씨의 두 아들인 김정철과 김정운이 부상하고 있다는관측이 제기되어 왔다.
고씨는 전체적으로는 베일에 싸여 있는 인물이지만, 지난 1953년 일본에서 태어나 60년대 초 북송선을 타고 가족과 함께 북한으로 건너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정일 위원장은 고씨가 만수대 무용단원으로 활약할 당시 반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씨의 아버지는 일본에서 유명한 유도 선수였으며, 고 김일성 주석 생전에는그의 앞에서 유도 시범을 보이기도 한 것으로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