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렬은 「6.15남북공동선언 실현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통일연대(통일연대)」를 이끌며 가장 적극적으로 반미·친북운동을 전개해온 인물이다. 통일연대는 2001년 3월15일 출범 이래 인천 자유공원 맥아더 동상 파괴를 기도하는 등 극렬한 활동을 벌이다, 2008년 3월 22일 한국진보연대(진보연대)가 만들어지면서 소위 발전적으로 해소됐다. 진보연대는 지난 해 광우병 난동(亂動)을 주도한 단체이다.
<선군정치는 평화정치?...공개적으로 연방제 주장>
韓씨는 주한미군철수-국가보안법 철폐-연방제라는 북한의 대남노선을 헌신적으로(?) 이행해왔다.
그는 모든 활동의 목표로 연방제를 제시해왔다. 예컨대 2007년 8월15일 서울 대학로에서 열린 「제2차 남북정상회담 환영 민족대단합 실현 청년학생결의대회」에서는 『6.15시대를 맞아 분단 암흑시대를 청산하고 우리 민족끼리 민족대단결로 연합제, 낮은단계의 연방제 통일로 한걸음 더 전진해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
韓씨의 언동을 보면 도저히 대한민국 국민의 발언으로 보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그는 2005년 9월 동국대 교수 강정구가 『6.25 통일전쟁』 주장으로 고발당하자, 같은 달 9일 서울 옥인동 공안 분실 앞에서 가진 姜교수 응원을 위한 기자회견에서 『나는 한국전쟁이 애국적 통일전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실정법 위반으로 잡아가야 하지 않는가. 오늘 이 사건은 바로 보안법의 못된 정체를 폭로하는 계기가 되리라고 생각한다』며 400만 명을 죽음으로 몰고 간 김일성의 남침(南侵)전쟁을 『애국적 통일전쟁』이라고 표현했다(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59451).
韓씨는 2004년 8월8일 평택 팽성읍 농협 앞에서 「주한미군 철수 결의대회」를 열고, 『혹자는 주한미군이 떠나면 안보가 위태롭다고 하지만 북쪽의 선군정치는 남쪽을 향한 것이 아니오, 미 제국주의와 싸우기 위한 것이오, 선군정치는 바로 (한반도)평화정치인 것이다』라며 김정일 독재의 선전논리인 선군정치를 『(한반도) 평화정치』라고 옹호하고 나섰다(출처 : 통일뉴스.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46213). <계속>
2005년 5월28일 회문산 청소년수련원에서는 이른바 「남녘 통일애국열사 추모제」라는 간첩·빨치산 추모제가 열렸다. 300여 명이 참석한 이 행사에서 한상렬은 『일본, 미국 이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쳐 통일해 나가는데 밑뿌리이신 통일애국 열사들을 기억하는 자리』라고 연설, 적화(赤化)통일을 기도했던 간첩·빨치산을 통일애국열사로 불렀다. 韓씨는 2008년 5월4일 통일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을 계속 오가는 가운데 『특별히 기억나는 북측 인사들은 누구냐?』는 기자의 질문에 김영대, 허혁필, 정덕기, 리춘복, 강영섭 등과 함께 『안경호 선생의 통일에 대한 열정과 박학다식하고 명백 명쾌한 이야기들도 생각난다』고 답했다. 韓씨가 언급한 이들은 북한의 대남공작 책임자들이다. 안경호 역시 대남공작 부서인 통일전선부 부부장을 지낸 인물이다. 적화(赤化)통일 음모를 꾸미는 자에게 『통일에 대한 열정』 운운한 부분은 韓씨가 말하는 통일의 모습을 추측케 한다. <통일조국이 눈앞에 펼쳐지는데...』 자유북한방송 몰려가 행패> 韓씨가 역점을 둬 온 분야는 탈북자들의 북한인권 문제제기를 방해하는 일이다. 그가 대표로 있던 통일연대는 2004년 6월11일 소속 회원 30여 명을 데리고 탈북자들이 만든「자유북한방송국」 앞으로 몰려가 방송중단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당시 「자유북한방송국」 김성민 대표는 韓씨의 확성기를 빼앗으려다, 통일연대 소속으로 보이는 수 명의 젊은이들로부터 폭행을 당해 바닥에 굴렀고 곧 구급차에 실려 갔다. 통일연대 측은 金대표가 구급차에 실려 간 이후에도 『민족공조가 우리 민족전체의 지향이고, 통일조국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현실에서 북측을 비방하는 따위의 방송은 설 자리가 없다』,『6.15공동선언의 이름으로 규탄한다』,『자유북한방송의 비방방송으로 민족화합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는 등의 주장을 하며 10여 분간 시위를 계속했다. 韓씨는 2004년 북한인권법안이 美상원에서 통과되자, 10월1일 美대사관 앞에 통일연대 회원들과 함께 몰려가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북에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나라』라며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쳐 난국을 뚫고 나가야 한다』고 미국을 비난했다. 韓씨는 2005년 2월14일 「북한인권-난민문제 국제회의」가 개최되자, 서울 종로 5가 기독교회관 2층 대강당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제는 6.15 공동선언을 실현함으로 하루빨리 평화롭게 통일을 이루어나가야 할 때인데 결정적인 방해, 걸림돌이 있다』며 『이북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대상이 아니고 바로 미국 자기 나라처럼 엄연한 핵보유국이요, 주권국가라는 것을 인정하고 대화하면 된다...우리 국민은 소위 인권운운하면서 기만술책을 흘리고 있는 미국에 동조하거나 놀아날 것이 아니고 다만 우리 동포, 우리 민족인 이북을 옹호하고 함께 민족공조로 이 난국을, 전쟁위기를 헤쳐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계속>
한상렬은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소속 목사이다. 기장 총회는 2009년 중점사업으로 『북측 조선그리스도교련맹과의 변함없는 연대와 협력으로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일』을 열거하는 등 북한 조선그리스도연맹과의 연대·협력에 힘을 쏟아온 교단이다. 韓씨는 87년 목사 안수를 받았고, 한 해 전인 86년 6월25일 전주 고백교회를 세웠다. <『미선이·효순이 사건을 통해 기도가 이루어진 감동이 있다』> 韓씨는 친북·반미 행태를 종교적으로 신념화해왔다. 그는 2002년 12월1일 여중생범대위 대표 자격으로 이른바 방미(訪美)투쟁단을 이끌고 뉴욕으로 떠나기 직전 통일뉴스 인터뷰에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 여중생범대위는 2002년 6월13일 주한미군의 훈련 중 교통사고로 사망한 효순이·미선이 추모를 위해 만들어진 단체로서 같은 해 반미(反美) 촛불집회를 주도했었다. 『지난 3월20일부터 미(美)대사관 앞에서 7박8일간 한미군사합동훈련을 반대해 단식 시위를 하면서 간절히 기원한 내용이 이뤄지고 있는 것 같다. 그때 우리 민족이 친미(親美), 굴미(屈美)를 떨쳐버리고 「회계하라 미국, 회미(悔美)」, 「철수하라 미국, (撤美)」, 「반대한다 미국, 반미(反美)」 운동으로 하나가 되어 제2의 3.1운동을 일으킴으로써 진정한 민족자주를 수립하고 우리통일의 민족끼리 통일의 역사를 이룰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그런데 미선이·효순이 사건을 통해 기도가 이루어진 감동이 있다.』 인터뷰에 따르면 2002년 3월부터 회미(悔美), 철미(撤美), 반미(反美)를 간절히 소망하며 기도해 왔는데 같은 해 6월13일 『미선이·효순이 사건을 통해 기도가 이루어진 감동이 있다』는 것이다. 미선이·효순이의 죽음이 단식하면서까지 부르짖어 온 회미(悔美), 철미(撤美), 반미(反美)의 기도가 이루어진 것이라니? 이것이 양심을 가진 사람이 할 말인가? 韓씨는 2004년 7월26일 광화문 열린시민공원에서 열린 「이라크 추가파병철회를 위한 금식기도회」에서 예수의 40일간의 단식기도를 소개하면서 『우리민족 역시 예수의 역경과 같은 위험에 처해있다』며 『민족사 속에서 파병을 반대하고 이 땅의 정의를 세우는 일을 우리의 기독인들이 앞장서서 바로 세우자』고 말했다. <『성령님의 감동·감화 속에서 이런 결단을 했다』> 韓씨는 2006년 3월4일 통일뉴스 인터뷰에서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기도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이 하나 되는 일, 우리 사회가 하나 되어 가는 일에 항상 기도하면서 잘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내 과제다...다만 기도할 뿐이고 기도하면서 역할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할 뿐이다...오늘 아침 성령님의 감동·감화 속에서 이런 결단을 했다. 그냥 바치자. 죽음을 살자. 오늘 아주 눈물이 더 나왔다. 역사를 생각해서 감사의 눈물이. 그래서 오늘 박용길 장로님 만나면서 기도하라고 해서 내가 했는데 이런 내용을 기도했다...오늘 이런 감사를 담아서 광화문 사거리의 촛불시위 현장 쪽에서 청와대랑 인수봉을 바라보면서 1시간 기도했다. 11시 11분 11초부터 기도를 시작해서 하나가 되는 역사, 우리민족이 하나 되는 것은 세계 평화의 열쇠이이기도 하다. 우리민족이 하나 되는 경험을 갖고 세계가 하나 되는 역사를 만들어야 한다.』 『기도하는 사람이며, 성령님의 감동·감화 속에서 결단』하여 이른바 통일(?)운동을 한다는 것이다. 극렬한 친북반미 투쟁이 종교적으로 체화돼 있음을 엿볼 수 있는 발언이다.
당시 취재기자는 5월4일부터 7일까지 3박4일간 평양방문 중 양각도 호텔 2905호실에서 있었던 방북단의 예배모습을 취재하며 『고민영 목사는 "한국 교회가 민족을 살리는 것은 통일뿐이다. 이 예배가 통일의 시초가 될 것이다. 문익환 목사를 비롯, 사죄의 삶을 살고 있는 한상렬 목사가 십자가를 지고 있다. 주의 성령이 어서 오길 바라며 이 죽음에서 승리하길 바란다"고 기도했다.』고 적은 뒤 『한상렬 목사는 "비가 오는데도 아이들이 아리랑 공연 하는 것을 보며 이것이 민족의 저력이구나 했다"며 "민족의 저력을 바탕으로 통일을 이루길 바란다"고 말했다.』고 덧붙였다.
<『아이들의 아리랑 공연을 보며 민족의 저력이구나 했다』> 韓씨가 말한 「아리랑」공연은 북한정권의 체제선전극(宣傳劇)일만 아니라 아동까지 체제선전과 외화벌이 수단으로 삼는 「아동착취극(搾取劇)」 내지 「아동학대극(虐待劇)」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연습 중 쉴 틈을 주지 않아 남녀노소(男女老少)할 것 없이 용변은 그 자리에서 해결해야한다. 여성들은 간이 칸막이를 만들고, 남성들은 비닐 주머니를 사용한다. 문제는 이 같은 학대와 고역으로 돈을 버는 주체는 김정일의 로동당이라는 데 있다. 탈북자들은『거의 1년 내내 계속되는 훈련의 강도가 너무 심한데다, 한 사람이라도 기계적인 동작을 익히지 못하면 그가 속한 단위(팀) 전체가 휴식 없이 훈련을 받아야하므로 온갖 욕설과 구타가 난무 한다』, 『많은 사람들이 한 사람처럼 움직이는 가운데 날아가거나 밑에서 (사람을) 받는 등의 위험한 동작들이 많아 사고사(事故死)가 빈번하다』고 말한다.
韓씨는 아이들을 짐승처럼 혹사시켜 만들어낸 「아리랑」이라는 인간기계극(機械劇)을 가리켜 『비가 오는데도 아이들이 아리랑 공연 하는 것을 보며 이것이 민족의 저력』이라고 말했다.
<용산참사현장 한몸평화/ 남북관계 한몸평화/ 4대강 한몸평화』> 韓씨의 아내인 이강실氏 역시 목사이다. 그는 2008년 5월4일 통일뉴스 인터뷰에서 『부인 이강실 목사도 전북 6.15공동위 상임대표다. 자녀도 두지 않으면서까지 부부가 통일운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는 질문에 『둘이 결혼을 약속하면서 하느님 앞에, 역사 앞에 헌신하자고 자녀를 안 두었는데, 크게 자랑할 일도 아니고 그만큼 살아오지를 못했다. 치열하게 살자고 했지만 열사와 역사 앞에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韓씨의 전주 고백교회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아래와 같은 기도제목이 나온다. 「한몸평화」라는 단어가 반복되는데 이는 일종의 종교적 강령으로 보인다. 그대로 인용해 본다.
《11월11일은 한몸평화의 날입니다. 11월 11일 11시 11분 다음과 같이 함께 야! 삼일주님 한몸평화. 지금여기 한몸평화. ( )님 한몸평화. 한몸이니 한몸으로 한몸되게 하옵소서. 11월 11일 하나의 날 한몸평화 만세의 꿈. 기원했으면 좋겠습니다...함께기도...용산참사현장 한몸평화/ 남북관계 한몸평화/ 4대강 한몸평화 / 양평산님 한몸평화/ 배OO님 한몸평화/ 박OO님 한몸평화...》
<계속>
[ 2009-11-15, 01:36 ]
부산3862009-11-15 오전 9:40
이자는 적화통일이 되면 아마 대학총장이나 시장, 지사나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자리가 보장된 노동당 비밀당원들이 남한에 수두룩하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건재하는 한, 이런 인간에는 일말의 희망도 없다. 그래서 이런 인간들의 소망은 하나도 대한민국이 망하는 것이고, 둘도 대한민국이 하루라도 빨리 김정일의 밥이 되는 것이다. 그래야 자기 인생도 의미를 찾을 수 있으니....
[손충무 칼럼] 김대중 묘비에 새겨진 출생의 거짓말ㅡ그 진상을 처음 밝힌다!.. 전라도 검찰은 진짜 호적등본 찾기 위해 칼럼자의 사무실과 집을 3일간 뒤졌다
(손충무 칼럼)
지난 8월 18일 세상을 하직, 8월 23일 현충원에 묻힌 김대중씨의 죽음이 2개월도 못되어 국민들 머리 속에서 잊혀져 가고 있다.
그런데 10월 6일 오후 묘비 제막식 때문에 또 한번 세상을 소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그 바람에 지금까지 파묻혀 있던 김대중인가? 윤대중인가? 제갈대중인가? 하는 치욕스러운 비밀까지 살아나게 했다.
김대중은 살아 생전에도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을 정도로 한국 사회를 소란스럽게 만들고, 영.호남을 분열시키고, 호남사람들을 거짓말쟁이로 만들고, 서로 믿지 못하는 불신사회로 만든 장본인이었다.
그런데 죽어서도 사회를 소란스럽게 만들고 현충원 국립묘지를 어지럽게 만들고 있어 그를 비판하는 국민들의 시선이 일그러진다.
살아 있을 때 나라를 그렇게 혼란스럽게 만든 장본인인데 눈을 감고 땅 속에 들어간 후에는 좀 조용해지고 편안해 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다. 노무현의 모습을 보라. 조용하지 않는가? 그런 면에서 노무현이 김대중 보다 한 수 높다.
물론 시끄럽고 어지러워야 과연 김대중 다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땅 속에 묻힌 이후에도 김대중으로 인해 한국 사회가 소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지난 6일 묘비 제막식을 하는 이날 김대중 묘역 주변에는 약 200 여명의 추종자들이 모였는데 그 시각 현충원 국립묘지 입구에서도 200 여명의 비판자들이 모여 ‘김대중 국장과 현충원 안장 취소’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지난 8월 23일 국립묘지에 안장될 그 시간부터 거의 1주일에 한번씩 애국 시민단체들이 현충원 앞에서 “김대중 국장 취소, 현충원 안장 취소” 를 요구해 왔으며 시위를 하다가 때로는 경찰에 체포 당해 고통을 받기도 했다.
경찰의 과잉 탄압에도 ‘김대중 국장취소, 현충원 안장취소 하라’는 시위는 계속되고 있다. 아마 김대중의 묘를 파 낼 때까지 상당 기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추종자들과 전라도 사람들, 친북 左派들은 하늘 같이 받들어 모시는 김대중을 전라도를 제외한 절대 다수의 국민들은 왜 그렇게 싫어하고 외면하고 있을까?
▲ 보수단체 회원과 시민들이 현충원 정문에서 ‘DJ 묘비 제막식 우상화 규탄’을 위한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 대답은 간단하다. 묘비가 제막되는 그 시간 현충원 앞에서는 “김대중은 진짜 보다 거짓이 더 우상화 되어있는 인물”이라는 피켓이 시선을 끌었다.
그것은 사실이다. 김대중은 그 인간에 대한 진실 보다는 거짓과, 가짜, 짝통이 너무 과대포장 되어 우상화 되고 있는 부분이 많이 있다.
김대중 광신도들이 ‘김대중 종교’의 교주처럼 떠 받드는 꼴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백제 계백 장군 이후에 태어난 영웅” 이라고 까지 하지 않던가?
6일 제막된 김대중의 묘비에 새겨진 그의 일대기를 소개한 내용만 보아도 얼마나 거짓 투성이로 만들어져 있는지? DJ가 걸어온 길을 아는 사람들은 쓴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다.
거짓말이 저 정도면ㅡ묘비 문을 지은 사람도 제2의 김대중이를 닮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자신은 모르고 있을지 모른다.
김대중의 거짓말 가운데 ‘기네스북에’ 오를 거짓말은 “나는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후 약속은 안 지킨 일은 있어도 한번도 거짓말을 해본 적은 없다”고 한 말이다.
아마 상당한 세월이 흘러도 이런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 정도의 거짓말을 조크 정도로 생각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그의 묘비에도 어처구니 없는 거짓투성이가 가득히 새겨져 있다.
이제 김대중의 묘비에 새겨져 있는 거짓말과 진짜는 어떤 것이었나를 한번 살펴보자.
ㅡ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후광 (後廣) 김대중 선생은 본관이 金海 이시다. 아버지는 김운식 공이고 어머니는 장수금 여사이며 1924년 1월6일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도 에서 태어나셨다ㅡ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멀쩡한 거짓말이다. 김대중은 자신을 만들어준 진짜 생물학적인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私生兒(사생아)이다. 지금 같으면 DNA 검사를 해보면 간단하게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아버지로 되어 있는 김운식은 김대중이 7살 때 자신의 호적에 첩의 아들로 이미 7년 전에 태어난 庶子로 올려 주어 학교를 다니도록 만들어 주고 먼 훗날 정치인으로 변신한 김대중의 호소로 본부인과 이혼하고 4일 후 김대중의 어머니와 바로 결혼 정식, 정부인으로 올려 김대중을 嫡子로 만들어 주었을 뿐이다.
김대중의 어머니 장노도(張齒島-후에 장수금으로 개명)씨는 18살 때인 1911년 같은 옆 섬 마을에 사는 제갈성조(諸葛成祚) 라는 사람에게 시집을 가서 딸 2명을 낳았다.(1990년 9월 29일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장 김광홍 발행 호적초본)
1920년 12월 제갈성조가 사망하자 제갈성조의 형인 제갈성복(諸葛成福)이 과부가 된 젊은 제수씨를 위로 해주기 위해 자주 동생 집을 방문하다가 비밀리에 육체관계를 가졌으며 아이를 임신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여러 증언과 기록에서 나온다.
인구 1천 여명 정도의 좁은 섬 마을에 젊은 과부의 배가 불러오자 소문이 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제갈성복은 장노도 여인이 출생한 건너편 섬인 뻐리섬으로 이사를 보내면서 친구인 윤창언(尹昌彦) 에게 중매를 서는 것처럼 하여 동거를 시켰다. 윤창언은 본래 농악을 하는 사람이었으며 부인과 사별한 후였다.
동거를 한지 얼마 안되어 출생한 것이 사내아이였다. 그의 이름을 윤대만(尹大萬-또는 윤성만)이라고 불렀다. 그가 훗날 김대중이로 변한다. 윤대만 이가 태어날 때 김대중의 이모가 되는 장도산이 조산원 역할을 했다고 한다.(윤창언씨의 조카 윤일만 경찰관 증언, 공화당 조사 팀 조사 기록)
그 2년 후 장노도는 다시 사내아이를 출생했다. 그는 윤창언과 사이에 정상적으로 태어난 아이였다. 그는 윤대의(尹大義) 라고 불렀다고 한다.
몇 년 후 윤창언도 사망했다. 김대중의 어머니 장노도는 졸지에 딸 2명 아들 2명을 길러야 하는 청상과부가 되었다. 그녀가 어려울 때 김대중의 생물학적 아버지이자 한때 동거했던 시숙 제갈성복이 돈을 내어 뻐리섬 선창가에 주막집을 차려 주었다.
그 주막집에 큰 섬을 돌면서 발동선을 이용 방물장사(생활용품 장사)를 하러 자주 섬에 오던 김운식(金云植) 씨와 동거를 하다가 윤대만이 7살이 되어 초등학교를 가기 위해 호적이 필요했다.
당시 뻐리섬에는 초등학교가 없었고 서당만 있었다. 초등학교를 가기 위해서는 본 섬인 큰 섬으로 가던지 목포로 가야만 했다. 장노도는 뻐리섬의 재산을 정리, 목포로 옮겨 가서 여관을 경영하면서 김운식의 호적에 첩으로 올라간다.
당시 호적에는 본부인 외에 제1첩 –제2첩을 호적에 등재했으며 첩하고 사이에 출생한 자녀들은 서자(庶子-첩이나 외부에서 외도를 하여 얻은 자식)로 올렸다.
1924년(단기 4257년) 7월 7일 윤대만이 김대중(金大仲) 으로 이름이 바뀌어 김운식의 서자(庶子)로 등재되었다.(1988년 7월 18일 하의면장 장명우 발행 호적등본)
당시 김운식에는 본부인 김순례(金順禮)가 있었으며 그사이에 아들 대봉, 딸 매월, 안례, 용례 등 1남 3녀가 있었다.
목포 北국민학교(초등학교)와 목포상고를 거쳐 6,25 전쟁 후 부산 피난 건국대학교 야간부 2학년을 다니다가 목포에서 1954년 국회의원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된 바로 다음날 전과 7범의 민원비서실장 오길록을 검찰에 보내 칼럼자를 비롯 함윤식, 손창식, 이도형 등 언론인 등 14명을 형사 처벌하라는 고소를 했다. 사진은 지난 2002년 '한길소식' 손창식 편집인이 칼럼자에게 보낸 편지
목포의 나이든 유권자들은 김대중의 출신 성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표가 나오지 않았다. 목포에서는 자신의 출생비밀 때문에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된 김대중은 1959년 6월 5일 강원도 인제 지구에서 출마하면서 다음해인 1960년 6월 1일(단기 4293년) 호적을 정리했다.
계부 김운식은 6월 1일 본부인 김순례와 협의 이혼을 하고 6월 5일 첩으로 있던 장노도와 정식 혼인신고를 하여 정부인이 됐다. 그와 함께 서자 김대중은 적자(嫡子) 아들로 승격한다.(1990년 9월 15일 신안군 하의면 면장 김광홍 발행 호적등본)
사람들은 김대중의 그런 출생비밀 사실을 모르고 세월은 흘러갔다. 그러다가 1971년 그가 야당의 대통령 후보자로 탄생하자 당시 공화당 의장이었던 김종필의 사무실에 신안군 하의면과 목포 등지에서 김대중의 출신 성분과 공산당 관련 사실을 알리는 투서 형식의 편지가 수십 통이 들어왔다.
그래서 김종필 의장은 비밀리에 김대중의 정체를 알기 위한 신상 조사반을 만들었다. 이 조사반에 경찰, 중앙정보부, 군 특무대 출신 요원들 5명이 차출됐으며 팀장에는 헌병장교 출신 수사관 하영조(河永祚)가 임명되었다.
그런데 이들 5명 가운데 김대중과 5살 까지 함께 살던 의붓 아버지 윤창언의 조카 윤일만(尹一萬)이 포함되어 있었다. 윤일만은 당시 치안국 특정과에 근무하던 경찰 수사관이었다.
따라서 장노도 여인이 임신을 한 후 자신의 작은 아버지뻘이 되는 윤창언씨 집으로 재가를 온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장노도 여인이 김운식의 첩으로 가서 김대중의 이름을 갖게 된 사실을 집안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모두 알고 있었다.
김대중 신원 조사반은 40일간 신안군 하의도, 뻐치섬, 목포 등지로 다니며 조사한 기록을 김종필에게 넘겼으며 김정필이 그 보고서를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박정희는 그 보고서를 읽은 후 공식 발표는 하지 못하도록 지시했으나 공화당은 은밀하게 소문을 흘렸다. 박정희가 당선되고 한참 세월이 흐른 후 1979년 10.26 사건이 발생하면서 유신정권의 망령이 막을 내렸다.
1980년 5월 서울의 봄은 매우 떠들 석 하고 혼란스러웠다. 5월 8일 경주에서 경주 김씨의 金山大祭 제사가 열렸다. 이 자리에 김대중이 참석했다.
그런데 이 행사장 여러 곳에 “윤대중은 물러가라” “제갈대중은 사라져라” 하는 플래카드가 나부껴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런 사실이 가십(gossip) 으로 언론에 보도되자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기자들에게 “김대중씨는 대통령에 출마하는 것 보다는 자신의 姓氏를 먼저 찾도록 하라”고 말했다.
전두환이 정보부에 보관되어 있던 김대중의 파일을 보았던 것이다. 그때 서울에 머물던 일본 산케이신문(山徑)의 시바다 미노루(紫田憓) 논설위원과 칼럼자는 통역 김영희를 데리고 신안군과 목포 등지를 돌며 취재했다.
시바마 미노루는 도쿄로 돌아가 ‘김대중의 좌절’이라는 글을 5월15일부터 6개월간 산케이신문에 연재 보도한 후 책을 발행했다. 그는 기사를 통해 섬에서 만난 노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취재한 김대중의 출생 비밀을 폭로했다.
그 책은 일본에서 출판되었기 때문에 한국 국내에는 극소수 사람들만 아는 가운데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1986년 공화당 중앙위원을 지낸 이한두(李澣斗)씨가 ‘유신공화국’이라는 책을 발간하면서 문제의 김종필의 지시에 의한 하영조 조사 보고서를 전문 그대로 게재했다.
그 내용에 추가 첨부를 하여 1997년 10월 한길소식(발행인 함윤식, 편집인 손창식) 제2호에 '김대중 출생 및 가계의 비밀을 밝힌다'고 몇 페이지에 걸쳐 보도했다.
이 기사를 칼럼자가 발행하는 인사이더월드에 전재했다. 사실 당시 칼럼자는 하영조 보고서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도 사용하지는 않았다.
김대중은 1997년 12월 17일 당선됐으며 다음날 아침 당선 제1성으로 “정치보복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다음날 전과 7범의 민원비서실장 오길록을 검찰에 보내 손충무, 함윤식, 손창식, 이도형 등 언론인, 출판인, 소설가 등 14명을 형사처벌하라는 고소를 했다.
그리고는 검찰총장에게 야당 국회의원 5명을 보내 자신이 고소한 그들 14명을 해외 출국금지, 긴급구속 하도록 압력을 행사했다. 함윤식씨가 1차로 구속되고 칼럼자가 몇 개월 후에 2차로 구속되었다.
한편 손창식씨는 불구속 기소가 됐다. 칼럼자는 징역 2년, 함윤식은 징역 1년 6개월, 이도형은 집행유예 2년, 손창식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됐다. 검찰 수사관들은 칼럼자의 집과 사무실을 3일 동안 뒤졌다.
그러나 이미 칼럼자는 김대중에 관련된 주요 자료는 다른 곳으로 모두 빼돌렸으며 미국과 일본에 한 카피씩 갖다 두었다. 칼럼을 쓰는 이 시간 처음으로 김대중이 제갈성복의 후손임을 밝히는 호적등본, 김운식의 서자로 입적한 호적등본, 서자에서 적자로 둔갑하는 호적등본을 공개하는 것이다.
김대중이 당선된 후 정보부에 있던 파일, 보안사령부에 있던 파일은 모두 흔적없이 사라져 버렸으며 신안군 하의면과 목포지방 법원에 보관되어 있어야 할 제갈성조, 김운식의 호적이 모두 개정되었거나 멸실로 사라져 새로 작성했다는 것만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제 독자들은 처음으로 김대중의 어머니 장노도씨가 제갈성조 집안으로 시집을 간 사실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아마 칼럼자가 이런 귀중한 자료를 갖고 있는 사실을 김대중 가족들과 추종세력들은 생각지 못하고 묘비를 거짓말로 만든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