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 사는 사람은 누구나 고민이 있다. 철없는 아이들도 나름의 고민이 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백팔번뇌라고 그 수까지 말하고 있다. 그 수가 그리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생각해보면 인생은 참 고민이 많다.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는 영생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그 고민은 자신에 대한 고민이었다. 참 이 고민처럼 귀중한 고민은 드물다. 그 고민이 많은 사람을 영생에 이르는 출발이 되게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자신의 영생에 대한 고민을 넘어서 자신의 민족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다. 참 거룩한 고민이요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고민이다. 남을 위한 고민.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고민이다. 오늘 내 고민은 무엇인가? 묻게된다. 거의 모든 것이 나의 고민이 아닐까? 정말 너를 위한 고민, 그들을 위한 고민이 있어야 하리라.
말씀의 둘째 부분인 6절부터는 육신의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삭에게서 난 자" 즉 영적인 자손이 구원에 이른다는 것을 말한다. 또 야곱과 에서가 구분된 것도 그들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심에 따른 구원임을 말하고 있다. 요즘 back to Jerusalem운동이 유대인들도 다시 일부가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정도가 아니라. 모두가 다 돌아올 것처럼 생각한다든지. 뭐 육적인 예루살렘, 제사, 성전등이 다시 회복될 것처럼 생각하는 운동들이 일어나는데 성경의 전체적 흐름을 본다면 이는 분명 지나친 생각임을 지울 수 없다. 다시 육적 이스라엘을 붙드는 것이 바울과 성경의 의도, 즉 하나님의 의도가 아님은 분명하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을 없는 복음을 생각하며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되는 내가 되어야 하리라. 미전도종족을 위해 무릎을 꿇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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